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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끊긴 길 위에서 사무국
조회 : 34, 등록일 : 2017/09/20 14:16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8211.html#csidx7783b8ec7796334ab417fef9b8bc8ce

이설야, ‘남광 자망 닻 전문’,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 2016)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길이 끊기는 곳을 향해 서 있기로 한 시가 있다. ‘서 있기로’ 했다고 썼거니와 시인은 인천의 “화수부두로 47번가에서”라고 말한 후 길이 끊겼음을 알리기 위해 1연 1행의 자리에서부터 쉼표를 찍었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보았기에 시인은 끊긴 길 위에 있으려는가.


“화수부두로 47번가에서, 길이/ 끊겼다// 공장 안에 갇힌 바다/ 커다란 철문 안에 선박이 줄에 묶인 채 녹슬어가고/ 갈매기들이 공장 굴뚝 연기를 지우다가/ 폐수 흐르는 검은 바다에 내려 앉아 물고기를 찾고 있었다//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대고 문을 두드릴 때가 있다// 문 닫은 상점 앞에/ 아귀를 들고 누군가 서 있다/ 백발노인이 도마 위에 내려놓고 배를 가르자/ 내장과 함께 황새기, 임연수, 새우깡 봉지가 쏟아져나왔다//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온 길이/ 바다의 수심을 내리치는/ 도마 위에서 끝이 났다// ‘남광 자망 닻 전문’ 간판 아래,/ 오후가 오후를 지우며 느리게 걸어간다/ 붉은 닻들 서로 엉겨붙어 더 이상 가지 못하는데,/ 소라 껍데기를 매단 그물들이 바다를 찾고 있는데,// 물고기들의 눈이 서서히 닫히는 화수부두// 길은 어디까지가/ 길인가”
- 이설야, ‘남광 자망 닻 전문’ 전문


한때는 발전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추동력 삼아 “화수부두로” 곳곳에 세워졌을 “공장”은, 이제는 발 묶인 “선박”이 “녹슬어가고” “폐수”로 인해 검게 변한 “바다”가 썩어가는 쇠락한 풍경의 일원이 되었다. 뿐인가. ‘닻’을 만드는 가게 앞에 모여 있는 “그물들”은 바다를 향해 펼쳐지지도 못한 채 엉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화수부두”의 시간이 더디게 가도록 붙잡고 있는 것 같다. 바삐 움직이는 세상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화수부두”는 ‘닻’을 내린 채 거의 정지해 있는 곳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화수부두”에 고여 있는 황폐에 대한 책임은 이 장소에 한때 모여들었던 부푼 희망들에만 있는 것 같지 않다. 길이 끊어졌음을 알아챌 수 있는 “47번가”에서 “어쩔 수 없이”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면서, 혹은 “도마 위에서” “아귀”의 배가 갈라질 때 “황새기, 임연수, 새우깡 봉지”와 같이 심해도 감추지 못한 나쁜 사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매정하게 등을 돌려버린 풍경이 이 세계에는 있음을 깨닫는다. 뒤로 밀려나 사라지기만을 요구받는 어떤 풍경은 지금 세계의 막다른 자리만이 품을 수 있는 진실을 바로 그 자리에서 끝까지 사수하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후략)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7년 8월 24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08211.html#csidx7783b8ec7796334ab417fef9b8bc8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