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바보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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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10-04 14:14 조회5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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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에 잡히면 빠져나가기 힘들어
자기만의 세계 만들고 벽 너머는 배척
뇌 구조는 의외로 단순 쉽게 편애와 혐오 낳아
다른 견해가 대치할 때 과학자들은 고집 안 해
이익과 상황에 따라 주장 뒤집는 법률가들
정치문제에는 자리 살펴
바보의 벽, 소통의 벽 나는 어떤 벽 지녔나
사색하며 점검해야
민주주의 가치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반대론이나 회의적 견해가 더러 존재하지만, 민주주의의 영향력은 갈수록 지배적이다. 전체주의 국가조차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내용의 다양한 변천을 겪으며 넓게 확산된 민주주의는 마침내 개인의 내부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세계 구석구석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시대를 맞아, 특정한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누구나 자기 견해를 밝힌다. 이러한 상황을 만인이 전문가 아니면 평론가가 된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발생한 문제에 관하여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 전문가가 따로 없고, 거기에 댓글이라도 달면 평론가가 되는 셈이다.
정치적 문제를 두고 혼자 전문가로 나설 것인지 평론가로 나설 것인지 망설인다고 하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오간다. 의식에 무의식의 작용까지 겹친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이미 하나의 자기와 또 다른 자기가 밀고 당긴다. 즉흥적이든 고심의 끝이든 내면의 자기들 사이의 표결에 따라 이른 결론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배송차에 싣는다.
내면의 민주화라고 부르면 그럴듯하지만, 실상 개인의 의사란 균형의 면에서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의사면서 사회비평에도 적극 참여하는 도쿄대 명예교수 요로 다케시는, 인간은 한번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거의 빠져나갈 수 없다고 단정한다. 저마다 뇌라는 개인의 의사당에서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의견을 만들어내는 듯이 보이지만, 어차피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식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경계를 ‘바보의 벽’이라 칭하고, 벽 너머는 아예 무시하거나 배척한다고 지적한다.
뇌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의 보조배터리 역할을 하는 글리아세포 그리고 혈관이 전부다. 정보가 입력되면 전구 같은 신경세포의 불이 켜지거나 그대로 있거나 한다. 반응하는 세포는 동시에 천 개 이상일 때도 있으므로, 무수한 형태로 정보를 처리한다. 자극이 역치(閾値)에 달하면 신체를 이용해 출력한다. 입력을 x, 출력을 y라고 하면, y=ax다. 이때 a는 현실의 무게다. a=0일 때에는 어떤 외부의 정보도 무용지물이다. 반면 자기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일 경우 a는 무한대에 근접한다. a에 의존하는 y의 값은 이성적 판단뿐만 아니라 감정에도 작용하여 편애와 혐오를 낳는다.
정작 과학의 세계는 다르다. 서로 다른 견해가 고집스럽게 맞붙어 대치하고 있을 때, 반드시 하나가 옳고 하나는 그른 것이 아니다. 둘 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자연 자체가 애매하기도 하지만, 이론적으로 상보성의 원리가 뒷받침한다. 20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프랭크 윌첵의 말을 되새겨 본다. “나의 논쟁 상대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른다.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시각에 서 보려는 노력은 진실에 한발 다가서게 한다.”
이데올로기의 세계 내부는 언제나 100%의 진실로 차 있다. 진보와 보수 논객은 말할 것도 없고, 항상 대립하는 여야 정치인과 그 정치를 바라보며 가담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비슷하다. 대의명분 없이 당사자의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 어제 주장했던 것과 정반대의 법리를 오늘 아무렇지도 않게 내세우는 법률가들도 정치 문제에서는 어느 벽 뒤가 자기 자리인지 살핀다. 반면 신중한 과학자는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결코 얕보지 않는다. 바보의 벽과 소통의 벽의 차이다.
저마다 뇌 내부에서 스스로 자극을 주고받는 사색이라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벽을 점검해 보기 좋은 기회가, 차례 간소화로 더 여유가 생긴 추석 연휴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4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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