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법대로'의 단순성과 복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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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11-06 16:22 조회3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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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생각 좋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면 행동할 타이밍 놓쳐
입법자 이성이 만든 법과 규범의 속성은 생각할 시간 절약
법 제정·거부권 충돌 때 헌법의 이성은 토론·협상·양보 기대
진영 이익만 고려해 법대로 하는 현실은 단순성의 극치이자 생각 없는 행동
서로 싸움에 골몰해 권한 행사 반복하면 승리가 곧 패배 될 것
행동은 생각한 다음 단계다. 생각이 없는 듯한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생각한 뒤에 행동하라”도 모자라, “한 번 더 생각하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생각이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깊이 생각해도 곤란하다. 진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전개되면 행동의 시기를 놓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타나는 의문을 칼로 베듯 제거해 나아가 사태의 본질에 이르도록 고민하다 보면, 결론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행동의 지침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규범이다. 생각할 시간을 절약해 주겠다는 듯, 그대로 따르라는 지시가 법의 속성의 하나다. 법의 단순성이다. 사람보다 법의 명령을 따르라는 원리는 입법자들이 이성적 상태에서 법을 만든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법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자주 바뀌지만, 만들어진 법은 바꾸기 전까지는 그대로다. 이성적 상태에서 만든 법은 이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의 비이성적 변덕을 가려낼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법의 복잡성이 엿보인다.
정치는 생각이 있는 행위인가? 생각 없는 정치 행위가 어디 있으랴마는, 생각 없는 행동만 보여주는 무대가 우리 정치판 같은 인상 때문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생각은 복잡하고 일치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생각의 결과라 할 행동은 단순하다. 찬성 아니면 반대, 가끔 기권이라는 선택지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결론에 이르는 생각의 과정이 설득력 있게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는 행위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당의 법률안 제정권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헌법이 보장하는 두 권한은 피상적으로는 서로 상반된 힘을 배치한 모순의 제도처럼 보인다. 하나의 권한은 다른 권한을 예외로 두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의 권한은 다른 권한의 예외적 상황이다. 이런 제도를 둔 헌법의 이성은 토론, 협상, 양보, 줄다리기, 결단, 관행의 존중 등이 동원되어 균형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했을 터이다.
그러나 정쟁이 벌어져 그 수단으로 헌법의 권한을 행사할 때에는, 생각의 단계에서 금방 인식의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권한의 의미와 행사의 결과에 대한 충분한 고려보다 행사 자체가 급해진다. 인식의 한계는 해석의 한계에 부딪힌다. 자기 정당이 맞닥뜨린 현실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로만 여긴다. 따라서 권한의 행사는 법대로 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도 헌법대로 한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느냐다. 단순성의 극치다.
실제의 정치적 행동은 나름 심각한 생각의 결과다. 치밀한 전략적 숙고 끝에 당내의 반대까지 물리치고 이르는 결론이다. 하지만 그 생각과 고민은 순전히 자기 진영의 사정과 이익만 고려한 것이다. 상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라는 태도는 “무시하겠다”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의 눈에는 생각이 없거나 부족한 정치 행위로 보인다.
정치 행위를 공공의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상대 정당과 싸워 이길 무기로만 여길 경우, 헌법의 이성이 실제로 작동한다면 당장 그 권한을 빼앗아버릴지 모를 일이다. 자기에게 속한 권한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행사 주체의 자격이 있는 법이다. 싸움에 골몰하여 법률 제정권과 거부권과 재의결권 행사를 쳇바퀴 돌리듯 반복할 경우 자기의 승리는 곧 상대의 승리를, 결과적으로 자기의 패배를 가져올 뿐이다. 그것을 깨달을 정도라야 생각 있는 정치 행위라 할 것이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4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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