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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두 여름의 대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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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8-07 10:09 조회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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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 꿈꾸던 소녀 첫 직장 입사 후

5·18 기념 집회 참석했다가 해고

고심 끝 무효소송 법 독학해 승소


사시 도전 합격 후 판사의 길

젠더 문제 남다른 관심보여

법원 정보시스템 구축하기도


호기심·상상력에 바탕한

특이한 경력의 대법관후보

사법부 변화를 기대한다


공학도를 꿈꾼 소녀가 있었다. 기술을 연마하듯 노력으로 갖춘 실력에 행운까지 겹쳐 처음 개교한 포항공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축하 꽃다발처럼 화려한 출발이었지만, 신입생이 된 그해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전국 방방곡곡이 고양된 상태였다. 군부 독재의 마지막 주자가 6·29 선언으로 시민 앞에 굴복했을 때조차 강의실과 실험실은 감정을 배제한 회색빛이었다. 자연과학과 기계의 물리적 법칙은 사상이나 이념이 힘을 발휘하는 가치 판단의 세계와 달랐다.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영일만 바다는 푸른색이라는 점에서 동일했다. 그 바탕에 가끔 나타나는 배 한 척이나 구름 한 점이 자신처럼 느껴졌다.


졸업과 동시에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종합제철에 입사했다. 겉으로는 엘리트 사원처럼 보였으나 실질은 노동자나 다름없었기에, 현실에 무심할 수 없었다. 입학 때 맞닥뜨린 격정적이었던 아카데미 바깥의 인상은 계속 이어져,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초여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 집회에 나갔다. 정치의 세계는 공학도가 상상하지 못했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예측도 계량도 할 수 없는 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피부에 와 닿았다.


그녀의 손을 낚아챈 것은 형이상학의 자기장이 아니라 법이라는 이름의 강제력이었다. 집시법 위반으로 잠시 연행되었고, 그 사실이 회사에 통보된 결과는 해고였다. 여름의 문턱에서 벌어진 사건은 충격이었다. 흔들림의 강도는 앞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고심 끝에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물을 수 있는 데마다 묻고 받을 수 있는 도움을 받아, 혼자 재판을 수행했다. 법의 세계는 공식과 이론이 난무하는 과학의 영역과 모든 생각을 단순하게 현실의 일부로 만들어내는 정치 영역을 논리적 방식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경험으로 얻은 자기 세계의 확장은 승소 이상의 기쁨이었다.


해고는 무효가 되었지만, 직장에 복귀하지 않았다. 다시 법과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경찰의 완력보다 법관의 말 한마디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예기치 못한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판사는 또 하나의 직업이었고, 재판은 일상의 업무였다. 똑같은 실험을 수없이 거듭하다 하나의 가설 입증에 겨우 도달하듯, 왜곡된 경쟁의 그늘에서 짓눌린 인권 하나를 건져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하는 법관들이 그러하듯 성실성으로 밀어붙여 자기만의 보람을 일상화했다. 젠더법연구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정체성의 폭을 넓혔다. 특허법원에서는 공대 시절에 익힌 정보시스템의 구축과 운용의 기억이 되살아나 가끔 법리와 서로 융합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법관 후보로 제청되었다. 자신의 꿈과 상상력이 종전과 다른 진보적 미래 세계의 사법부를 꾸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명감에 조용히 내면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 여름이 유난히 뜨겁게 여겨지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절의 무더위 탓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정치 영역의 민주적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 단계에 멈칫하고 있다. 30여 년 전 초여름이 이 한여름에 겹쳐지면서 자기 성찰과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지점에 섰다.


특이한 경력의 새 여성 대법관의 탄생에 거는 기대로 준비했던 짧은 글이 보류된 절차 때문에 과거 회고를 내일에 투영하는 감상의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미 취임한 두 대법관보다 늦어지게 될 그 며칠이, 지난날 여름의 일처럼 특별한 의미가 될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를 위해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병직 변호사(법무법인 클라스한결·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4년 8월 3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00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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