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어제와 내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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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10-04 14:17 조회6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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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앞 하나 남은
사회과학 서점
오래된 노트 속엔
학생증 맡기고
몇 푼씩 꿔간 이름들
골목 안 술집 서랍엔
30년 넘게 묵은
300여 장의 학생증
사회에서 성공해
찾아오기도 하지만
잊은 이들도 많아
돈 꿔가고, 외상 달고
이제는 옛말 된 시대
추억은 남기고
변화 받아들여
신구세대가 함께
새 질서 맞을 때다
A 대학 앞의 A 서점은 마지막 남은 사회과학 책방이라는 이름에 값하듯 낡은 번역서들로부터 노동사회연구소 신간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모퉁이의 책상 앞에 앉은 주인은 원칙주의자다. 고집스럽게 도서정가제를 지키며, 건물주가 임대료를 인상할라치면 조목조목 부당성을 따져 호통을 쳤다. 진보적 저자들 초청 세미나도 열고 주변 중등학교에는 배달도 나가지만, 아내의 맞벌이 없이는 운영이 힘들다. 학생들은 책 살 돈이 부족하거나, 책만 읽기에 너무 바빴다.
서점에는 희한한 노트 한 권이 비치되어 있었다. 대출 장부였다. 돈이 급한 학생들은 서점을 찾았다. 꾼 돈이라야 대개 1~2만 원, 간혹 5만 원도 있었다. 궁핍한 서점주인은 자기보다 딱한 처지의 젊은이들을 위한 학생금고를 겸업하는 셈이었다. 담보는 신분 확인을 겸한 학생증, 당연히 대출 기한과 이자는 없다. 대개 학생증을 찾아갔지만, 상당수는 잊거나 포기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변호사나 국회의원이 청춘의 퍼즐 한 조각을 맞추려는 듯 겸연쩍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술로 혈기를 진정시켜야 책 읽을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서점보다는 술집에 학생증이 많이 쌓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B 대학의 동기회장은 졸업 30주년 행사 준비로 학교 앞을 오가다 골목 안쪽의 B 술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날 고몬지 이몬지로 불리던 아주머니의 대를 이어 딸이 운영하는 중이었는데, 우연히 술집 카운터 서랍 속에 학생증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종이와 플라스틱 조각이 뒤섞인 그 뭉치는 질권증서나 전당표가 아니라 전통의 분위기와 학생들의 신뢰가 부여하는 영업표찰의 상징이었다.
운영진과 의논한 뒤, 회장은 다시 술집을 찾았다. 무지와 미망의 열정이 저지른 역사적 연대채무를 500만 원으로 갚았다. 주인이 자못 아쉬워하며 건네준 300장 가까운 학생증은 행사 당일 특별기획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련한 감상의 영수증에 새겨진 희미한 사진은 보는 사람 저마다의 초상이었다.
빌려 쓰든 먼저 사용하든 나중에 갚기로 하는 약속은 법률체계 이전의 일이다. 생활에 나타나는 현상 하나를 묶어 소비대차나 매매로 명명하고 채권이라는 권리를 탄생시키는 순간, 세상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졌을지 모른다. 자기가 얻는 이익과 반대급부로 이행해야 할 의무가 감정 따위의 개입 없이 명료해진다. 그것이 사회발전의 기초가 되는 예측 가능한 경제생활이다.
술집이나 서점 주인에게 규범이 요구하는 경제관념은 없었다. 학생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거래하고 도왔을 뿐이다. 그 결과는 마치 특정한 앎을 전하지 않으면서 앎의 원인이 되도록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제원칙이나 법의 원리를 무시한 영역에서 생성된 경제와 법의 자양분이었다.
지금 학생들은 서점에서 돈을 빌리거나 외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A 서점에서 마지막 대출이 이루어진 것은 이미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서점 주인은 언제든 돈을 빌려줄 태세로 기다리는데, 학생들이 서점과의 사이에 형성되는 모종의 작은 경제공동체를 이용하는 일을 불편해한다. 소액이 필요하더라도, 굳이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비정형의 연대의식보다 앞서는 것이다.
진보든 퇴보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신구가 섞인 세대다. 지난 일은 뒤돌아볼 때 아름답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학생증이 아니다. 내일을 기약하는 법률가의 세계에서도, 과거를 회상하는 세대의 눈에는 현재를 주도하는 세대의 방식이 친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맞아들여야 한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4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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