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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족벌 사학, 그 낡은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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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18 14:04 조회23,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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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벌 사학, 그 낡은 갑옷


한 평범한 직장인이 어느날 아침 문득 징그러운 갑충으로 변해버렸다는 카프카의 악몽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가령 이런 광경은 어떨까? 한 대학의 아침, 학교에 나온 학생과 교수들은 교실마다 책걸상이 굵직한 쇠사슬로 서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하게 된다. 자유와 지성의 공간이어야 할 대학 교실에 쇠사슬이라니, 기괴하고 생소한 풍경이어서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 법하다. 그러나 불과 10여년 전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에서 실제로 발생한 일이다.


당시 교정에는 구(舊)재단의 횡포에 맞선 교수들이 농성 중이었고 학생들은 총투표로 전면 수업거부를 결정한 터였다. 결의의 표시로 학생들이 그 전날 책걸상을 복도로 들어낸 것인데, 놀랍게도 그것들은 밤새 쇠사슬을 휘감은 채 교실로 돌아와 있었다.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간 교수들은 기가 막혔다. 철컥거리는 쇠사슬로 엮인 책걸상에 억지로 학생들을 앉히고 무슨 강의가 가능하겠는가? 결국 구재단이 퇴출되고 나서야 이 참담한 상황이 끝나고 대학은 안정을 찾는다. 비단 이 대학만이 아니라 그 당시 분규를 겪은 끝에 퇴출된 족벌사학재단은 수십 곳에 이른다.

그러나 관선체제로 제자리를 찾았던 대학들이 수년 전부터 다시 흔들리고 있다. 현 정권이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구성원들의 반발이나 대학의 혼란을 도외시하고 구재단을 하나하나 복귀시켜왔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구호의 직격탄이 바로 이 사학들에 떨어진 셈이다. 돌아온 구재단 이사 중에는 지난 세월의 한을 풀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자도 있다고 한다.


시대착오가 심하면 기괴한 느낌이 드는데 근래 구재단의 복귀 행렬이 바로 그런 예다. 대개 족벌을 이룬 구재단은 대학을 세습권까지 있는 개인재산으로 여긴다. 탈근대를 말하는 이 세계화의 시대에, 대학을 사유물처럼 세습하려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상만큼 기괴한 시대착오도 드물 것이다. 진작 대학교육의 공개념이 확립된 서구는 물론, 우리처럼 사학비중이 높은 일본에도 소유권을 내세워 분란을 불러일으키는 설립자는 없다.


이처럼 유독 후진적인 이 현실은 해방 이후 사학의 과도한 팽창에서 기인한 폐습 때문이다. 설립자 개인이나 가족 중심의 대학운영이 점점 고착된 결과 대학환경이 현격하게 달라진 지금에는 교육현장을 억누르는 낡은 틀이 된 것이다. 10여년 전 분규사태들이 이 틀이 깨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진통이었다면, 최근의 구재단 복귀사태는 대학을 다시 족벌체제라는 낡은 족쇄에 채우려는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내 ‘당권파’의 구태가 비난받고 있지만, 시대착오라면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시민사회의 기반을 흔들어온 현 정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례없이 장기화된 방송사 파업이 그렇듯이 도처에서 이 역행이 파열음을 내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에 맞서서 낡은 갑옷을 고수하는 자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현재 진보당 사태는 바로 이 구각(舊殼)을 벗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수구보수세력의 낡은 갑옷은 기득권이라는 단단한 쇠사슬로 감겨 있어 더욱 문제적이다.


사학 영역만큼 이 연계가 뚜렷한 곳도 드물다. 구재단 복귀행렬의 시발점인 영남대부터가 그렇다. 군부정권에 의해 이사장이 되었다가 재단비리로 이사직에서 물러났던 박근혜씨가 현 정권의 방침에 힘입어 정이사의 과반수를 추천함으로써 사실상 대학은 다시 박씨 집안의 것이 된다. 여권의 유력 대권후보부터가 퇴행의 수혜를 톡톡히 누린 것이다.


그런 낡은 갑옷을 껴입은 채로 미래를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더구나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할 대학을 사유물로 간주하는 고루한 사고로는 교육선진화는커녕 지도자로서 국가를 경영할 자격도 없을 것이다. 교육개혁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다. 행여 낡은 갑옷의 통치자가 등장하는 비극이 없기를, 다시 카프카의 ‘변신’에 버금가는 기괴한 광경이 대학에서 재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영문학
(경향신문, 201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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