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윤후명의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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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7-06 10:20 조회35,3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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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후명과 <꽃의 말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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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국작가들의 여행체험이 두터워졌다 해도 윤후명(尹厚明)의 『꽃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12)만큼 인문지리적 상상이 풍요로운 작품집은 드물 것이다. 그의 고향 강릉(江陵)과 협궤열차의 인천(仁川)을 비롯, 프랑스와 러시아와 꾸바를 거쳐, 스리랑카․버마․태국․중앙아시아․티베트․중국․일본 등을 발섭(跋涉)하는데, 특히 아시아 편력은 장관이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한국문학의 아시아 월경(越境)을 시도한 작가다. 중편 「둔황(敦煌)의 사랑」(1982)은 그 원점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소설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하다. 당시로서는 금단의 땅인 중국을 제재로 삼았다는 선구적 의의야 없지 않지만 그 둔황은 살아있는 중국이 아니라 방부(防腐)처리된 관념의 중국에 지나지 않으매, 이 소설은 전두환독재정권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의 어둠으로부터의 낭만적 초월로 독해될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혐의는 차치하더라도 외국여행이 부자유한 그 시절, 와유(臥遊)로 아시아가 육체를 구유(具有)하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거니와, 민주화 이후의 여행자유화가 작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 점은 반어다. 그리하여 그 혜택에 힘입어 이 소설집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에 대한 학지(學知)가 두텁다.
가령 「꽃의 말을 듣다」는 「구름의 향기」(『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다시 쓴 것인데, 티베트에 대한, 한국문학이 거둔 최고의 문학적 보고로 기록될 터다.(그런데 한국과 티베트에 반한 한족 루이如意가 등장하는 2장은 ‘나’의 한글민족주의까지 더해 1장에 비해 손색이 없지 않다) 이 작품의 화자도 ‘나’다. 그런데 ‘나’와 작가 사이에 거리가 거의 없다. 따라서 허구라기보다는 여행산문 내지 철리산문(哲理散文)에 가깝다. 영혼의 편력을 정직하게 기록한 몽떼뉴적 의미의 에쌔(essai)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나’의 자의식에만 지펴있다는 것은 아니다. 커녕 좋은 에쌔가 그러하듯 대상에 내재적으로 접근한다. 그리하여 공감적 눈으로 ‘나’는 오늘의 티베트, 그 살아있는 현실을 탐사하는 것이다. 강변의 길가에 좌판을 벌여놓고 여행객들을 기다리던 청바지 차림의 소녀가 그 중심에 자리한다. 한때 중국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전사의 나라였던 토번(土蕃)을 도저한 정신의 고향으로 바꾼 라마교, 중국에 자율성을 잃은 뒤 단속적(斷續的)으로 이어지는 라마승려들의 ‘피의 시위’, 그리고 그 무구한 자연의 위용으로 대표되는 아이콘 대신, 홀연 등장한 이 청바지 소녀는 우리의 순진한 티베트 상상을 단번에 파괴한다. 청바지는 코카콜라(코카콜라가 들어가지 못한 곳이 북한․꾸바․버마, 단 세 나라인데, 버마가 드디어 개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와 함께 모든 오지를 침투하는 자본의 첨병이다. ‘오래된 미래’의 어린 주민을 어느 틈에 장사꾼으로 내세우다니, 정말 시장은 ‘달나라의 장난꾼’이다. 이제 티베트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아주 간곡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다.”(251면) ‘나’는 이 소녀 앞에서 티베트가 ‘독립이냐 굴종이냐’식의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 복잡상황으로 진입했음을 단박에 눈치챈 것이다. 이 점에서 1장 <티베트의 무지개>의 마무리는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그런데, 소녀를 향한 그 말은 ‘짜이찌엔’이라는 중국말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우친 것이었다.(......)아, 소녀를 만나 티베트 인사말을 한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271면)
‘나’가 이처럼 상처받은 아시아와 대화할 통로에 섬세할 바탕은 무엇인가? 뜻밖에도 6.25의 내상(內傷)이다. ‘강릉철수’로 명명된 6.25 체험이 윤후명 문학의 원점이었으니, 그의 끝없는 편력도 그 치유여행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이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맨앞에 연이어 배치된 세 작품, 「강릉/모래의 시」․「강릉/너울」․「패엽(貝葉) 속의 하루」다. 그중에서도 「‘소행성’의 ‘분노의 강’」(『새의 말을 듣다』)을 다시 쓴 「패엽(貝葉) 속의 하루」야말로 인상적이다. 잊혀진 버마전선에서 구사일생한 학병출신 ‘선생’의 루트를 함께 탐사하는 형식을 취한 이 단편은 기억의 정치를 정면으로 다룬다.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본군 상관, 그 존재 자체가 기억의 보존으로 되는 종군위안부, 그리고 망각을 거슬러 기억을 추적하는 고행의 도중에서 병사한 ‘선생’, ‘나’는 그 사이에서 부처의 말씀을 나뭇잎 종이 위에 송곳으로 적어 결집한 패엽경의 작업을 다짐한다. “이들 허깨비와 맞서야 한다.”(87면) 윤후명 문학의 새로운 고비를 암시하는 이에 이르러 그의 아시아는 ‘나’의 구원이 곧 타자의 모심으로 되는, 중생의 근본적 의타기성(依他起性)을 깨닫는 방편으로 떠오르는바, 정녕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나의 행복은 타인에게 달려있다.”(달라이 라마) 모쪼록 윤후명의 아시아가 더욱 깊어져 모호함의 정체가 모호해지는 형이상학 취미마저 극복되기를!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포럼, 201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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