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참을 수 없는 민심의 모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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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7-09 14:56 조회24,1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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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민심의 모호함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제목을 내세우는 것은 필자가 유난히 ‘용감’해서가 아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은 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의 정치철학부터 현대의 민주주의까지 관통하는 동서고금의 진리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민심의 척도라고 할 선거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빚는 것을 목도하게 된 난처함이 이런 의문을 던지게 한다. 가까이는 정권 심판의 국민적 바람을 뒤엎어버린 지난 총선이 어느 정도 그런 예라면, 시대흐름에 역행해온 현 정권의 기반이 다름 아닌 국민의 압도적 지지라는 그 민심이었다는 점이 새삼 환기되는 것이다. 대선출마를 공식화하는 후보들의 선언이 잇따르는 요즘 과연 민심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까닭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의 마음은 경제인 출신 대통령이 우리를 더 잘살게 해주겠거니 하는 데로 쏠렸다. 도덕상의 흠결부터 지도자로서의 하자가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민심은 그에게 압도적 승리를 안겼다. 그러나 그 여망이 배신당했을 뿐 아니라 당연히 누려온 사생활의 자유조차 훼손당해 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민간인 사찰이라니! 벌써 오래전에 우리 일상에서 사라진 그 독재의 촉수가 마치 유령처럼 우리 사이에 복귀해 있었던 것이다. 범법자들은 죗값을 받겠지만, 이런 부류를 선택한 그 민심이라는 것은 과연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사람들은 한숨지으며 말한다. “설마 이럴 줄이야 몰랐지.” 이 정권에서 상식과 교양이 짓밟히는 경험을 하도 겪다보니 이제 내성조차 생겼지만, 이런 탄식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민족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남북관계의 퇴행이나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빈부격차의 심화는 차치하고라도, 필자가 관여하는 문화나 교육 영역에서조차 그런 막무가내가 지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창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할 문화판을 낡은 이념의 잣대로 휘젓는다거나 비리와 전횡으로 퇴출된 족벌사학을 무더기로 복귀시켜 대학 현장을 유린하는 행위가 그렇게 후안무치하게 저질러지는 것을 보면, ‘설마 이럴 줄이야!’를 되뇔 수밖에.
출마를 선언하는 대선주자들은 하나같이 민심을 따르고 반영하겠다는데, 문제는 그 민심이라는 것의 정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여론조사 결과도 실제 국민의 마음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마음이라는 것은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 그 틈새를 노리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비롯해 민심을 헷갈리게 만드는 갖가지 정치공학의 기술이 횡행한다. 방송 등의 여론기구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그 일환이고, 지도자적 인품이나 자질과는 무관하게 민심을 휘어잡는 선거의 달인이 득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민심을 떠난 민주주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올바로 민심을 읽어내는 능력이 정치가의 기본 덕목이기도 하다. 정치를 새롭게 사고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절차인 통상적인 정치를 치안이라고 명명하고, 진정한 정치는 치안의 차원을 넘어서 기성질서의 정당성을 묻고 그 틀을 바꾸는 행위라고 했다. 민심과 관련해 말하자면 치안밖에 모르는 정치가는 민심에 야합하거나 아부하고 때로는 회유나 기만의 대상으로 삼는 반면, 진정한 정치가는 대중의 마음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그 고정관념을 쇄신해나가는 활동에 종사한다. 치안의 차원을 넘어서는 큰 그릇의 정치가라면 눈앞의 정쟁에서 이길 궁리만이 아니라 기성질서의 틀을 심문하고 혁신하는 안목과 뚝심을 가져야 할 법하다.
민심은 가변적이고 모호하지만 민주주의의 토대인 점은 여전하다. 그리고 선거라는 공간은 이미 굳어진 질서를 그 민심이라는 불확실성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새롭게 편성할 계기를 제공한다. 또 이를 통해 국민 개개인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할 기회를 갖는다. 온갖 화장술로 민심을 현혹하는 선거 달인에게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는 것이 민주시민의 자질이라면, 민심에 종속되지 않고 그 왜곡된 욕망 너머 변화에의 열망을 읽어내는 그런 지도자가 그리운 시기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2.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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