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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빌헬름 폰 훔볼트 『인간교육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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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8-03 17:43 조회23,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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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 다시 읽기]빌헬름 폰 훔볼트 『인간교육론 외』

ㆍ국가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대학에 근무하면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대학만 없으면 이 사회가 얼마나 좋아질까 하고 말이다. 단순하기 그지없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 줄은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 아니면 어린 청소년들이 그 좁고 답답한 교실에 처박혀 꽃다운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을 테고 소득의 상당 부분을 십년 넘게 수상한 사교육 기관에 상납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별로 배우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에 천만원 안팎의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도대체 대학이 뭐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지게 한단 말인가.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자 국가 백년지계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구로 각광받던 날들은 지났다. 이제 대학은 계급 양극화와 상징자본의 불균형 분배를 고착화시키는 고약한 기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국가와 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앞장서서 챙겨주는 일이 대학의 임무가 되었고, 국가와 자본이 공동체의 공공적 규범이나 자원분배를 원칙으로 작동하지 않음은 초등학생도 아는 일이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이 땅의 대학에는, 답이, 없다.



만약 훔볼트였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19세기 국민국가 형성의 길 위에서 대학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여 현대 독일 대학의 제도적 초석을 마련했고, 부국강병이란 국가 목적 아래 갈수록 전문화되어 분화되어 가는 연구와 교육 개혁을 위해 전인적 인문교육을 강조한 위대한 교육철학자라면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인간 교육론 외>(책세상)는 대학 개혁론을 포함하여 훔볼트의 교육철학을 일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이 짧은 편역서를 읽으면 현재 이 땅의 대학이 처한 답 없는 상황에 일정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훔볼트가 피력한 교육철학이나 대학관을 접해보면 이 땅의 현실은 정말 답이 없다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각 분과학문을 통괄하는 종합적 지식이야말로 대학이 담당해야 하고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정점이라는 믿음, 그 믿음에서 출발하여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하고 지원은 최대화해야 한다는 대학 개혁 정책이 도출되는 논리, 그리고 그렇게 자유와 인류적 가치에 충실한 대학이야말로 국민국가 형성의 초석이 되리라는 호소, 그 어느 것도 지금의 대학 연구자들과 교육 관료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훔볼트의 교육철학과 대학론은 철지난 원칙론이자 이상론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 내용만을 읽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훔볼트의 사유가 가진 현재성은 그런 원칙과 이상 자체가 아니라, 그 원칙과 이상이 처한 역사 맥락을 고려할 때 생생한 함의를 던져준다.

훔볼트 시대의 독일 대학은 극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훔볼트가 말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어느 하나의 학문에 치우침 없는 통합 학문을 통해 형성되고 달성되어야 하는데, 대학이 그것을 담보할 수 있는 기관인 까닭은 대학의 구성원이 국가를 지도하는 공적인 임무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훔볼트의 교육철학은 해체되는 과정에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고했던 신분제적 사유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대학이 체현해야 하는 통합적 지식과 가치를 엘리트 계층의 규범으로 체화시키자는 구체적 목표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의 지배계층이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지식과 가치를 가져야만 독일이라는 신생 국가가 생존과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음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훔볼트 역시 신분제적 사유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하찮은 비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학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때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훔볼트의 변증법이다. 그는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더 강력한 국민 통합을 원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요청했던 것이다.



과연 이 땅의 현실은 어떨까? 국가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자유를 정신에게? 생각하면 할수록, 훔볼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땅의 대학과 교육, 정말, 답이, 없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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