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홍배] 세상 끝에서 보는 세개의 풍경 - 백무산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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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24 16:53 조회27,70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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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하나 하수구를 빠져나가다 걸려 있다
패션거리 네온 불빛 휘황한 거리의 지하도
지상을 떠받친 거대한 기둥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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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를 깔고 누더기 이불에 반쯤 가려진 벗은 여자
불에 타다 만 베개에서 떨어져 뒹구는 머리통
거품처럼 엉킨 머리채 누렇게 부은 볼에 뚫린 검은 입
훌러덩 드러내어 대리석 바닥에 쏟아놓은 아랫배
불룩 솟았다가 철퍽 가라앉고 솟았다가 다시 꺼지고
진한 거웃에 찔러넣은 의수 같은 손
아직 욕망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저 몸
나는 모른다
지상의 높은 곳을 오르다 굴러떨어졌는지
누가 저 높은 곳을 쌓으려고 벗겨가버렸는지
스스로 벗어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나는 안다
배설된 저 몸
다 소화되지 못한 욕망의 배설물
과식의 위장을 빠져나와 쿨렁쿨렁 하수구를 지나다
걸려버린 한 무더기의 배설물
아직은 누군가 그리울
아직은 단꿈이 남았을
한 무더기 배설물의 지상은 패션거리다
—「당신들의 배설물」 전문
백무산의 여덟번째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를 펼쳐드니 그를 처음 만나던 무렵의 기억이 아스라하다.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청사)가 나왔던 1988년 그는 집시법 위반으로 수감된 상태였고, 그해 초겨울 나는 울산으로 내려가 한평 철창 안에 갇혀 있던 그를 면회한 적이 있다. 그 무렵 그의 시는 1990년 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으로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운동의 함성이었고 투쟁의 불꽃이었다. 지난 이십년 사이에 그날의 함성과 불꽃은 싸늘하게 식고 잊혀졌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진보’를 자임하는 세력이 추악한 영토다툼을 벌이는 착잡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이 가파르게 바뀌어도 백무산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과 그 현실의 바깥에 대한 긴장된 사유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그 모든 가장자리』에는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1996) 이래 그의 치열한 시적 탐색이 나아가는 도정을 가늠할 수 있는 세개의 풍경이 있다.
위의 시 「당신들의 배설물」은 자본주의적 삶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처절히 되묻게 하는 지옥도의 풍경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시의 화자는 하수구에 걸려 있는 죽은 여인의 시신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패션거리의 지하도에 죽은 듯 널브러진 노숙 구걸인의 끔찍한 모습을 보며 하수구에 걸린 시신으로 상상하고 있다. 그 지하도를 하수구로 표상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토해낸 “한 무더기의 배설물”로 이곳까지 흘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인의 몸이 “하수구를 빠져나가다 걸려 있다”는 것은 시신과 다름없이 버려져 있음에도 죽지 못해 죽음이 유예된 처참한 형상이다. 저곳은 패션거리의 지하도이므로 숱한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일상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욕망의 배설물이 흘러드는 하수구를 통과하며 살아간다. 그 몸뚱이가 “지상을 떠받친 거대한 기둥에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살풍경이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화려한 외관 뒤에 감추어진 비참함의 전시장임을 말해준다. “반쯤 가려진 벗은 여자”의 “진한 거웃”은 화려한 패션거리의 마네킹에 길들여진 눈에는 이 처참한 몰골도 관음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무한 포식성을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직 욕망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저 몸” 속에도 “아직은 누군가 그리울/아직은 단꿈이 남았을” 여지를 떠올리면 애틋한 그리움과 단꿈마저 “다 소화되지 못한 욕망의 배설물”로 토해내는 이런 삶이 과연 사람으로 사는 것인지 뼈저리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아직 욕망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저 몸” 속의 욕망은 특정한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 여인을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시킨 착취의 체제와 저 여인 자신의 고유한 삶의 욕구를 구획하는 경계는 없다. “지상의 높은 곳을 오르다 굴러떨어졌는지/누가 저 높은 곳을 쌓으려고 벗겨가버렸는지/스스로 벗어버렸는지 나는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태의 표현이다. 그리고 “아직도 누군가 그리울/아직은 단꿈이 남았을” 몸이 “한 무더기의 배설물”과 한몸인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이러한 사태를 가리켜 백무산 시인은 “작금의 현실이란 전면적인 자본 지배가 가치화된 공간을 의미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내ㆍ외부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영토전쟁의 기억을 넘어서—제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에세이」, 『실천문학』 2009년 겨울호)고 적시한 바 있다. 따라서 그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안과 밖, 나와 비아(非我)의 대립적 구도를 설정하여 그러한 부정을 통해 긍정적 가치의 확산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자본의 욕망에 갇혀 있는 영토전쟁에 말려드는 것으로 귀착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자기동일적 기획을 넘어서 시인은 “아직 가치화되지 않고 현실로 호명되지 못한 거대한 잠재적 현실”(같은 글)을 상상한다. 그러한 가능성의 하나로 백무산은 인간사를 자연사에 비추어 투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령 다음 시가 그런 경우다.
새를 잡아본다
새의 몸이 따듯하다
새의 몸에 체온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무게 없이 부피만 있는 몸이 경이롭다
두려움에 떠는 새의 심장을 만져본다
그 야성의 심장에 손이 닿자 나의 온몸이 경련처럼 떨린다
날개를 펴본다 작은 몸에 크고 우아한 날개가 눈부시다
허공을 쪼개는 날카로운 부리가 있고
시간을 잘게 나누는 빛나는 눈이 있고
정밀한 숫자가 담긴 귀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노래를 할 줄 알고 뛰어난 비행술과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정확한 항해 지식이 든 그 작은 면적이 경이롭다
사랑에 아파하고 집을 찾아오는 기쁨을 알고
무리를 위해 희생을 아는 새
비상의 뜨거움을 아는 사소한 부피가 경이롭다
저 낯선 것과 내가
같은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 앞에 나는 말을 잃는다
얼마나 먼 세월 조금씩 딴 길을 걸어서
이렇게 우리가 만난 것일까
나는 오래 새를 놓지 못하였다
새는 천천히 두려움을 거두고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몸에 새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까
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새」 전문
다윈의 진화론을 계승한 헤켈의 학설에 따르면 한 인간은 개체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진화의 흔적을 반복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새와 인간이 공유하는 먼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과정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곧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한 과정이라 배워왔다. 그러나 지배를 위한 축적의 무한질주로 치달아온 근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인간이 만물의 포식자로 군림해온 과정이자 인간사회 내부에서도 약육강식의 폭력적 지배가 자본과 권력의 이름으로 관철되고 정당화되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가 배워온 인간의 승리, 인간승리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새에게는 자유자재한 비상의 자연적 수단이었던 모든 감각이 인간에겐 더 많은 무엇, 더 높은 무엇을 위해 길들여지고 발명된 감각으로 진화했다. 그것이 과연 진화일까 퇴행일까. 만물의 포식자이자 인간의 포식자인 오늘의 인간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사랑에 아파하고 집을 찾아오는 기쁨을 알고/무리를 위해 희생을 하는 새”의 존재이유가 과연 인간에게도 그러할까. “내 몸에 새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까/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물음은 “인간이 걸어온 모든 길을 다 걸어온 인간”(「그 모든 가장자리를」)은 비인간일 수 있으며, 잃어버린 새의 기억을 되찾아 거듭나지 않고는 그런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묵시론적 진단을 함축한다. 백무산의 초기시가 정치적 급진성에서 래디컬했다면 이 시가 보여주는 근본적인 성찰 역시 또 다른 차원에서 래디컬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성찰의 과정을 거쳤기에 예컨대 백무산의 다음 시는 단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머물지도 않고, 근대의 역사적 서사가 기획했던—잃어버린 낙원을 역사의 종착지에 투사하는—유토피아에의 희구까지도 넘어서 우리가 일구어야 할 다른 삶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생생한 시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불의 시대를 가로질러 대지의 품으로 걸어가는 시인은 “아, 나는 다 태어나지 않았다/대지는 아직 나를 낳고 있는 중이다”(「뱀」)라고 말한다. 대지의 품으로 끝없이 이어질 그 생성의 여정은 언제까지고 다함이 없을 것이다. “과거의 생을 더듬어/미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순례」) 대지의 순례에서 과거와 미래는 순차적으로 분절된 시간들이 아니라 언제나 찰나의 현재, 영원한 현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비 블로그 '창문'. 2012. 5. 18)사람들 떠난 마을에 낡은 우물 하나 있다
두꺼운 시멘트 뚜껑으로 굳게 잠겨 있다
그곳에 달 하나 갇혀 있을 것만 같은
마을 고샅길 끝나는 곳 우물 속은 언제나
새벽처럼 어둑해서 정화수 정갈하게 길어 올리고
발소리 분주하게 쏴쏴 동이물 길어가고
여름 한밤중엔 여인들 나와 달빛 아래 몸을 씻던 곳
퍼올려도 퍼올려도 꼭 그만큼 찰랑거리던 수면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썽이는 눈동자 속처럼 빨려들어
알 수 없는 깊이에 이어져
어딘가에서 할머니들 빌어 우리 목숨 점지하던
용왕님 있을 것 같은, 그 물줄기가 용왕님인 듯 목숨처럼 받들던 우물
우물은 우리 깊은 잠 속으로도 흘러들어
시퍼런 물결로 와서 꿈을 씻으며 메아리 지던 아득한 밤들
지쳐 기진맥진한 밤에 돌아와 조용히 몸을 누이면
어느새 갈라진 목젖을 적시며 차오르고
자고 나면 또 찰랑찰랑 새살처럼 고여오고
깊은 상처들 풀 자라듯 기워내던 우물
다시 새벽 어둑한 깊이에 두레박을 내려야겠다
오랜 세월 풀 수 없었던 이 갈증을 내려야겠다
—「우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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