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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신용등급 하락과 근대 일본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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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13 10:58 조회22,9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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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등급 하락과 근대 일본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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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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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용등급 추이 (서울경제 출처)

 

  얼마전 일본의 신용등급이 강등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신용등급 평가회사 피치사가 지난 5월22일 일본 국채의 신용등급을 AA에서 두 단계 낮추어 A+로 조정한 것이다. 국내 미디어에서는 일본이 한국과 똑같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보도에 열을 올렸지만, 그것이 곧장 한국 경제의 위상 제고와 일본 경제의 침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용등급 회사의 국채 평가방식은 일반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 평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평가 요소가 국채 평가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주요 미디어는 차분한 보도의 양상을 보였다. 아사히나 닛케이 등 주요 언론들은 이번 신용평가 하락이 금융시장이나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것으로 전망했고 실제로 발표 직후 엔 달러 환율이 잠시 하락했으나 하루가 지나지 않아 원래 환율을 회복했다. 미국 국채처럼 외환 시장에서의 거래에 의존하는 방식과 달리 일본 국채는 일본 국내 저축금액이 투자액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단기간에 신용 불량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종래의 믿음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국내 언론기관이 다소 과장되게 보도한 것과 달리 이번 신용평가 등급 하락은 일본 경제의 침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으며, 그것이 직접적으로 일본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피치사는 왜 일본의 신용등급을 강등 조정했을까? 그 까닭은 일본 국채의 단기적 신용상태 전망이라기보다는 일본의 더딘 경제 개혁에 대한 국제사회의 조바심이다. 이는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를 거치면서 일본적 근대화의 패러다임 변화가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데 대한 의아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소비세 인상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조바심과 의아함이 외 증폭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태이다.

일본 국회에서는 소비세 증세법안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사실 피치사는 이 증세법안의 성립이 지연되면 일본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더 강등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만큼 글로벌한 주목을 받고 있는 법안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 정계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집권당인 민주당 대표가 당내 반대파 리더들을 설득하기는커녕 회담 일정을 조율토록 간사장(한국의 사무총장)에게 의뢰한다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소비세 증세법안은 현행 5%인 소비세를 8%로 증세하자는 법안인데, 이를 통해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높여 국채뿐만 아니라 연금 재원 등의 안정성을 제고하려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법안이다. 이는 사실 연금 재정 파탄 등 정부 재정의 위험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안으로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것인데, 소비세 인상이라는 부담을 과감하게 떠맡을 정권 수임 세력이 존재해오지 않았던 까닭에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국제사회가 조바심과 의아심을 나타낸 것이 이번 신용등급 강등의 주요 원인이다. 당장 일본 국채의 신용상태가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정치권의 무능력이 일본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키고 시장 통제 불능에 따른 예측 불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우려를 나타낸 셈이다.

과연 소비세 증세가 올바른 정책방향인지, 국제사회의 일본에 대한 우려가 신자유주의적 금융 개방이라는 배경 하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 정치권 내부의 무능이 정부 방침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나타내는 건강한 표식은 아닌지, 이 모든 물음에는 일단 괄호를 쳐두자. 물론 증세, 신자유주의, 민주주의 등 일련의 사태에서 읽어낼 수 있는 함의들은 많지만 짧은 지면에서 과욕을 부리기보다 한 가지 함의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메이지 이후 150여년 동안 일본을 지탱해온 자원분배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시스템이란 중앙관료, 국회의원, 재계의 삼각동맹이 긴밀한 네트워킹을 통해 계획-입안하여 실행-집행해온 국가 예산의 총체적 분배를 말한다. 1970년대 이후에는 여기에 노동계까지가 가세하여 일본은 그야말로 ‘회사 사회주의’ 혹은 ‘지역 사회주의’라 불릴만한 계획-통제 성장을 이룩했다. 이것이 안정적인 고용과 임금을 지탱했고, 지배 엘리트와 노동계급 사이의 타협은 서로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면서, 즉 임금을 소비자 물가 상승률보다 높게 조정하는 대신 어느 정도의 부패와 비밀 정치를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순조롭게 이뤄졌다. ‘밑으로부터의 동의’가 시스템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메이지 이래 일본이라는 근대 국민국가가 ‘전통적 권위’의 급격한 파괴가 아니라 유연한 변형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 구조를 성립시켜온 것과 맞물려 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자연적이고 혈연적이고 지연적인 권위의 구조는 지역에서 토건 사업 등 국가 재정의 자원 배분 시스템을 지역 토호가 관장함으로써 온존되었고, 도시부에서는 ‘회사’라는 기구의 실체화와 가족화를 통해 샐러리맨의 충성을 바탕으로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 시스템 안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는 일상생활의 근거리에 있는 권위에 자연스레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며, 이 미시적 권위-복종의 시스템이 일본적 근대를 지탱해온 원동력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패전 후 일본에서는 국가-정치 차원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원활히 작동되었지만 일상-경제 차원의 ‘신체적 자유주의’는 매우 취약한 양상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다. “셸 위 댄스”란 영화에서 극적으로 형상화된 아버지의 모습, 즉 야근으로 지쳐 귀가한 가장이 회사보다 가정에서 소외당하는 남성 화이트칼라의 일상이 이 시스템을 압축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신용등급 하락은 이런 근대 일본의 시스템이 현재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그럼에도 새로운 시스템이 창출될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국제사회가 포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국제사회,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은 근대일본의 시스템이 재가동되는 일을 바라지는 않는다. 보다 개방된 금융시장이 보다 안정적인 정부 재정 하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로운 자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의 시스템에서 호기를 구가하던 정치인-관료-기업인들은 동물적 직감으로 알아챈 것이리라. 이 국제사회의 압박이 자신들의 목을 죄고 있음을.

다시 말하지만 국제사회의 요구와 일본의 기존 지배 엘리트의 저항 중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지 여기서는 괄호를 쳐 둔다. 다만 확실한 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좋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저항하는 대신에 신자유주의적 금융 드라이브의 파괴성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을 수립하는 일이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공명심이나 공공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원전사태나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등은 이런 지배 엘리트들의 정책 방향전환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추이를 볼 때 여전히 길은 먼 것 같다. 아마 ‘동아시아의 연대’가 기능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일 것이다. 근대 일본의 시스템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근대의 패러다임을 타자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의 열림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

 

 

※ 본 원고는 서남포럼의 주된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서남포럼, 201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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