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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박정희의 아들과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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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16 16:14 조회22,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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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상속자라는 견지에서 볼 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전두환,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라는 두 아들과 딸이 있다. 이들 가운데 아들들은 대통령이 되었고, 딸은  지금 대통령 자리를 향해 가고 있다. 상속자들은 박정희의 면모를 계승하되 박정희 안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여러 면 가운데 특정 측면을 더 두드러지게 잇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집권 기간 내내 반대자에 대해 사찰, 감시, 공작, 고문, 그리고 살해를 일삼았는데, 이런 면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통해서 한층 포악한 형태로 계승됐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정권만큼 집권 과정과 집권 기간 내내 심각한 폭력이 계속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국가와 공적 제도는 군벌 내지 조폭과 같았다.

박정희는 취약한 정당성을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을 통해서 보충하고자 했으며 그것에 매우 열정적이었는데, 그가 채택한 재벌편향적인 수출과 토건 중심 경제는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가 박정희가 덮은 청계천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박정희 시대로부터 이탈하려는 몸짓으로 오인했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박근혜 의원과 달리 박정희의 친자가 아닌 것에 안심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식 경제발전이 자기 시대에 가졌던 나름의 합리성을 상실한 시대에 그것을 괴물처럼 확장된 형태로 계승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유통기한이 지난 경제정책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된 인간관 그리고 성향을 만개된 형태로 발현했다. 이 점은 정적을 대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전두환은 정적을 폭력적으로 분쇄하려고 했다. 그는 탄압하고 고문했다. 이에 비해 이명박 대통령은 정적의 은행계좌는 물론이고 친인척과 지인 심지어 단골 음식점 계좌까지 이 잡듯이 뒤져 사법적 절차 자체를 징벌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종종 그렇듯이 세상으로부터 악을 지각하는 그 눈길 자체가 사악한 법이다. 그의 탄압 방식은 모든 인간은 사적 이익을 쫓을 뿐이고 그래서 사적 세계는 모두 추하다는 것인데, 그런 가정은 그 자신에게 가장 타당하다. 

상속자인 이들은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 또한 풍부하다. 박정희와 아들들은 언제나 북한을 자신의 실정과 과오를 덮고 국민을 겁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박정희 시대의 조작된 간첩사건과 그들에 대한 사법살해는 전두환 시대의 숱한 용공조작으로 이어졌고, 이명박 시대에는 햇빛정책의 모든 성과를 되돌리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박정희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그랬듯이 두 아들 또한 공권력을 활용해 사적 착복을 일삼았다. 물론 방식은 약간 달랐다. 전두환이 조폭들 ‘삥’ 뜯듯이 수천억의 돈을 착복했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 문제나 각종 민영화를 둘러싼 수상쩍은 행보에서 보듯이 “국가”를 “수익모델”로 만들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1961년 민정이양 약속, 1963년 민정불참 선언, 1967년 3선개헌 부인, 1971년 마지막 대선 출마 선언을 모두 뒤집었고 유신으로 영구독재를 시도했다. 이런 거리낌 없는 거짓말도 계승되었다. 전두환은 북한이 수공용으로 금강산댐을 짓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국민의 성금을 모아 대응댐을 지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반값 등록금 약속을 뒤집은 것을 비롯해 촛불집회 때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즉각 검역과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약속 또한 아무렇지 않게 뒤집었다.

이런 유사점 속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거짓말에 어떤 특이점이 있다는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2월 1일 국빈 방문 중인 헝가리 대통령 쇼욤 라슬로를 초청한 만찬 자리에서 박근혜 의원에게 "나도 지난 대선 때 어느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협박을 하러 와서 놀란 적이 있는데, 경호원들이 붙잡고 봤더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거짓말로 밝혀졌다. 그는 누구와도 다르게 용도 없는 거짓말까지 한다. 그야말로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렇다면 이런 아들들과 달리 박정희의 딸은 어떤가? 아들이 아닌 만큼이나 박근혜 의원은 달라 보인다. 그녀는 “아버지가 꿈꾼 나라는 복지국가”(2009. 11. 14. 박정희 전 대통령 92회 탄신제 유족 인사에서)라는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원칙과 신뢰를 그토록 내세워왔으니 아버지와 그 아들들만큼 후안무치하게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언어와 행동이 완전히 분리되어 우리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완전히 잊고 오직 행동의 연관만을 추적해야 했다. 이에 비해 그녀는 언어와 행동의 분리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다른 면에서도 박근혜 의원은 다르다. 아버지가 착복한 재산을 포기한 적 없고 그것에 얹혀 생계를 구한 바 있었지만, 스스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정책적으로도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고 있으니 이점에서도 아버지와 아들들의 성장주의로부터 조금은 비껴선 모양새이다. 또 반북 이데올로기가 지지층의 중핵에 자리 잡고 있는 한, 그녀가 남북관계를 화해로 이끌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것을 정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리라 예단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전두환처럼 공적 영역을 군벌화하지도 않고, 이명박 대통령처럼 사사화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녀에게는 공적인 것이 오롯이 공적인 면모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나쁜 성향을 더 순정하게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들과 다른 듯싶다. 우리가 그녀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납치와 고문을 지시하는 폭력의 박정희나 경호실장 차지철 옆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외설적인 박정희도 아닌 연두 기자회견 속 박정희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나쁜 점들마저 벗어난 듯이 보인다. 그래서 공과 사의 분리 이전의 원시적 폭력의 세계 안에 있는 것 같은 전두환이나, 공적인 것의 싹조차 없는 사적 인간인 듯한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 의원은 순수하게 공적인 인간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공적인 면모가 내가 보기에는 수상쩍은, 아니 오싹한 면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잠시 생각해보자. 사람은 왜, 그리고 어떻게 공적인 인간이 되는가? 누구나 그렇듯이 사람은 혈육과 친구와 이웃에 대한 공감과 동일시 속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그들에게 적용하고 넓혀나가는데, 이런 사적 삶이 확장됨에 따라 공적인 세계와 맞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타자의 이익이 필요하다는 안목 속에서 공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또한 자신됨 자체가 이런 넓은 사람들의 그물망 속에서 빚어진 것이며 자신이 가진 것 대부분이 그런 세상으로부터 값없이 얻은 것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공적인 인간이 되는 것일 게다. 요컨대 공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적 삶의 공백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자기 도야와 정화의 과정을 겪으며 이룩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의원의 공적 면모에서 그런 과정의 자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단지 그녀의 깡마른 사적 삶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여러 발언 속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아버지가……” 혹은 “아버지께서……”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공적 지향성이 아버지의 존재 자체로부터 직접 길어올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동일시하는 그 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증언과 기사와 연구에 의해 해명된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일종의 이상적 이미지이다. 물론 부모의 이상적 이미지에 매달리지 않는 자녀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자녀는 실제 부모와 대면하고 때로 투쟁하는 것을 삶의 과제로 한다. 그 투쟁이 지향하는 바는 부모 역시 복종해야 하는 사회의 상징적 질서와 규범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부모의 어떤 면은 내버리고 어떤 면은 계승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스스로도 복종해야 마땅할 규범의 세계가 아예 없었고, 도리어 사회의 상징적 질서와 도덕을 끔찍한 명령으로 대치한 원시적 폭군이자, 법과 폭력을 참을 수 없는 방식으로 뒤섞은 자였다. 그러므로 어떤 자녀도 박정희의 친자녀만큼 무거운 청산과 승화의 과제를 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의 자녀는 그 과정을 이룩하지 못할 때, 아버지의 굴레에 꼼짝 없이 갇힐 위험도 커지는 것이다.

이 내면적 과정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지만, 지난 3월 총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열린 9개 지역민방 공동 초청토론회에서 그녀의 발언을 통해 짐작은 해볼 수 있다. 토론회에서 그녀는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저는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며 “그분들께 사과를 드린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야권연대가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토론회에서, 부마항쟁으로 아버지의 통치에 일격을 가한 부산 시민에게 한 말이라는 점에서 정략적인 고려를 배제하기 어렵기는 하나, 정략적 의도가 있다 해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 점에서 박근혜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표현을 주의 깊게 보면, 이 발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녀는 아버지 박정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올바른 의도로 이루어진 사업인 산업화에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언으로 보건대 그녀에게 아버지의 어떤 면모도 부인될 수 없는 것 같으며, 그런 의미에서 승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러니까 아버지 박정희가 승화되지 않은 채 계승되고 있다면, 그녀에게서 드러나는 공적 면모는 박정희의 폭력성과 거짓과 사적 야심의 직접적 전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경우 박정희의 부정적 모습은 그녀의 공적 면모에 안감으로 덧대여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박근혜 의원의 공심(公心)은 정화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적 에너지를 공격성과 원한감정으로부터 길어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따금 드러나는 그녀의 싸늘하고 공격적이며 단정적인 자기확신의 발언은 단순히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발산 같은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부정적 면모가 더욱 권위적인 공적 형식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어떤 아들보다 위협적이고 섬뜩한 딸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2.5.11. 창비블로그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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