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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종말의 두려움, 구원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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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25 16:18 조회32,0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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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발하는 자연재해

  게르트루트 푸쎄네거(Gretrud Fussenegger, 1912~2009)라는 오스트리아 작가가 괴테 탄생 250주년 기념으로 출간한 청소년용 괴테 전기는 1755년 11월 1일 발생한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이 어린 괴테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감지된 이 지진과 북대서양 거의 모든 해안에 다다른 해일로 리스본 건물의 85%가 무너지고 27만 5천 명 인구 가운데 6만 내지 9만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괴테는 당시 여섯 살로 지적 호기심의 맹아가 막 싹트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어른들의 놀란 표정과 불안한 수군거림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물론 이 엄청난 자연재해는 어린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지만, 그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다. 볼테르, 루쏘, 칸트 등 당대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사상적 궤적에는 리스본 대지진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연재해라는 면에서 단연 18세기를 능가하는 것 같다. 수천 명의 조선인이 방화•폭동 혐의로 학살당했던 일본 관동대지진(1923.9.1)은 어느덧 과거지사가 되었다 치더라도, 최근에 일어난 인도네시아의 지진해일(2004.12.26)과 중국 쓰촨성 대지진(2008.5.12) 및 아이티 지진(2010.1.12)은 희생자의 규모에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이어서 발생한 동일본 지진해일(2011.3.11)은 그 너무도 생생한 방송화면으로 인해 우리의 시각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백두산이 20년 이내에 거대한 화산폭발을 일으킬 확률이 99%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도 있어 더욱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무엇이 진짜 재앙인가

  자연재해의 빈발을 대재앙의 전조처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심리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연재해 그 자체는 설사 큰 피해를 낳는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비오고 바람 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그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느냐이다.

  그런 점에서 작년 일본에서 지진해일에 연동해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자연재해의 외관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재앙, 즉 인간의 무지와 탐욕, 금력과 권력의 통제되지 않는 질주를 여지없이 폭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사고로 10여만 명이 겨우 옷만 걸친 채 집을 떠나 피난생활을 하고 있고, 수백만 일본인이 방사선 후유증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래도록 고통받을 것이며, 현장에서는 목숨을 건 수습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언제 끝날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런데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의 한 교수는 “후쿠시마 제1원전 지하를 진원지로 하는 매그니튜드 7급의 직하형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데,(『녹색평론』2012.5~6월호, p.9) 만에 하나라도 이 가능성이 실제 현실로 나타난다면 일본국가는 허리가 반토막 나는 궤멸적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 피해는 일본을 넘어 동북아 전체로 확산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존하는 절박성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소위 ‘원전 마피아’ 세력도 막강하지만,『원전을 멈춰라』(히로세 다카시 지음, 김원식 옮김, 이음 2011),『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비밀』(야마모토 요시다카 지음, 임경택 옮김, 동아시아 2011),『원자력의 거짓말』(고이데 히로아키 지음, 고노 다이스케 옮김, 녹색평론사 2012) 등의 저서에 기술된 바와 같은, 핵발전과 핵무기제조의 본질적 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하는 반핵•평화운동 또한 치열하다.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들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우리가 직면한 재난위험은 핵발전만이 아니다. 가령, 기아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알다시피 지금 아프리카와 아시아•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다수 주민들이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수많은 기아난민이 생겨나고 있다. 가까이 북조선에서도 1990년대 중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최소한 33만 명 정도가 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도 많은 북녘 동포들이 식량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지난해 ‘국민농업포럼’은 10월 16일 발표한 ‘세계 식량의 날’ 메시지에서 세계의 기아인구가 10억 2500만에 이른다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2010년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6.7%이고 이마저도 쌀을 제외하면 5%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식량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농가인구와 농경지 면적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국가안보와 국민건강의 기초가 되는 안전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기아의 원인은 물론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가뭄과 홍수, 농작물 병충해 등 자연재해는 당연히 외면할 수 없는 원인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8백만 인구 가운데 2백만이 굶어죽고 2백만이 해외로 이민을 떠난 아일랜드 대기근의 참사가 입증하듯 이 경우에도 근본적인 것은 자연재해 자체가 아니라 자연재해에 대한 인간사회의 잘못된 대응, 즉 강대국의 무자비한 수탈과 국내 계급구조의 모순이 문제인 것이다.

  인위적 재앙의 최고•최악의 형태는 두말할 것 없이 전쟁이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고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전쟁, 보스니아 내전, 르완다 내전 등 이름만 들어도 그 소름끼치는 야만성과 파괴성이 떠오르는데, 그런데도 왜 전쟁은 그치지 않는가. 제국주의 본연의 자기팽창의 속성, 오랜 연원을 지닌 이념적•종교적•인종적 갈등, 무기생산의 거대산업화, 정보통신과 전쟁기술의 결합, 약자에 대한 가학의 쾌감과 파괴의 충동, 인간심성에 내재한 폭력적 광기 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더라도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전쟁이라는 현상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총성이 멎은 지 60년이 다돼가는데도 여전히 6•25전쟁의 악몽 속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잔학성을 기록하는 작가정신

  격에 안 맞는 서론을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근자에 출간된 한 권의 장편소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달에 소개하려는 책은 다름 아닌 정찬『유랑자』(문학동네 2012)이다. 정찬은 문단생활 30년 동안 10여 권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발표해온 중견임에도 대중적으로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문학세계가 아주 독특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텐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내’가 어머니 장례식 참석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시작하여 삼우제와 넋굿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나’의 출생과 성장은 한국소설의 관행에서는 아주 색다른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학을 공부한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무용을 전공한 한국인이다. 그들은 유학지인 미국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낳고 나서 얼마후 신병(神病)의 고통이 너무 심해 아이를 떼어놓은 채 한국으로 돌아갔고, 결국 반년 뒤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된다. ‘나’는 어머니의 부재에도 큰 상실감 없이 예루살렘의 할아버지와 뉴욕의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성장하여, 지금은 주로 예루살렘에 살면서 십여 년째 전쟁취재 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다가 2009년 1월 임종을 앞둔 미국의 아버지에게 가서 어머니가 죽은 것이 아니고 한국에 살아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듣는 것이다. ‘내’가 마흔한 살일 때였다. ‘나’는 물론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므로, 그후 몇 차례 한국에 와서 어머니를 만나는 동안에도 강희라는 신(神)딸의 통역을 거쳐 대화를 나눈다.

  ‘나’의 출생담이 남다르고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주안점은 ‘나’의 생애를 극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재형 서사는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의 과거 서사를 호출하기 위한 매개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중층적 구조가 전제하는 소설적 장치는 환생의 개념이다. 작가 자신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소설의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유랑자』는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인간의 생애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애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환생사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중략) 저에게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환생입니다.『유랑자』의 주인공도 환생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전생에서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작가의 말’)

  ‘내’가 ‘나’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3월 31일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공격이 한창이던 바그다드의 한 병원에서였다. 그는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랍인 청년이었다. 당시 ‘나’는 전쟁발발 사흘 만에 이라크국경을 넘어가 “미국군의 시선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기자의 시선으로 바그다드의 참상을 취재하고 있었다. 미국 극우주의자들은 베트남전쟁 패배원인의 하나로 언론정책의 실패를 지목하고 있었으므로, 부시 정권은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종군기자 프로그램’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미국이 원하는 전쟁 메시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어떻든 ‘나’의 눈에 목격된 폭격의 현장과 병원의 실상은 그야말로 잔혹극 자체이다.

  폭탄을 맞은 집과 건물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뒤엉킨 철근과 녹아내린 유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아래로 찢겨나간 팔과 다리들이 뒹굴었다. 까맣게 불탄 나무에는 꽃무늬가 박힌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병원상황은 참혹했다. 공습이 격렬해지면서 의료진은 급증하는 부상자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의사도 모자랐고, 수술실도 모자랐고, 약품과 의료장비도 모자랐다. (중략) 내가 목격한 가장 참혹한 부상자는 응급수술실에 알몸으로 누워 있던 열세살 소년이었다. 타원형으로 길게 그을린 화상이 어깨에서 엉덩이까지 상체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새까만 석유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두 팔은 잘리고 없었다. 이두박근 부위 살점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절단된 한쪽 부위의 끝은 비틀리고 녹아서 갈고리처럼 보였다. 소년은 마취마스크를 쓴 채 잠들어 있었다.

  이런 참혹한 병원의 복도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이브라힘은 중상임에도 개의치 않고 초연한 태도로 ‘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는 사이 바그다드는 함락되고, 이브라힘은 위험한 수술 끝의 고열과 혼수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서 ‘나’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그가 벌써 오래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언제냐는 물음에 이브라힘은 “1099년 여름”, 십자군전쟁 때 서유럽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직후였다고 대답한다. 그 전생에서 이브라힘은 이집트 와지르(총독)의 기록관이었고, ‘나’는 서유럽의 침략군을 따라온 군종사제였다. 그는 십자군의 만행에 관한 너무도 끔찍한 소문을 들었기에 역사가로서 그것의 진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고,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음에도 예루살렘에 남아 십자군의 잔학행위를 목격하고 기록한다.

  학살은 해가 뜨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민가를 샅샅이 뒤졌다. 살육의 방식은 다양했다. 목을 자르고, 사지를 끊고, 복부를 가르고, 불속으로 밀어넣었다. 갓난아이는 벽 에 던지거나 바닥에 패대기쳤다. 몸속 장기를 끄집어내어 숨이 붙어 있는 다른 희생자의 입안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여자들은 강간한 후 죽였다. 음부에 자상을 내고, 이물질을 박고, 가슴을 도려냈다.

  십자군은 성전터의 제단 앞에서 희생제물 의식을 재현했다. 어린 양 대신 유대인과 무슬림의 목을 베었다. 목을 자르는 십자군의 움직임은 수도사처럼 엄숙했다. 희생자들의 목에서 뿜어져나온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피는 수문으로 흘러들어갔고, 기드론 계곡의 물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런데 십자군의 살인광란을 묘사한 이 장면들은 단순한 소설적 허구가 아니다. 나는 여러해 전에『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전쟁』(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아침이슬 2002)이란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책에 서술된 내용의 상당부분이 이 소설에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든 우리가 주목할 것은 ‘1099년 여름’의 참극이 ‘2003년 봄’의 사건에 대한 예정된 은유로서 마치 신이 계획한 사업인 것처럼 놀랍도록 정확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전쟁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환생의 모티브는 다시 한번 비약해 예수시대로 올라가는데, 이브라힘의 녹음기록 속의 ‘나’(와지르의 기록관)는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의 너무나도 지독한 고통의 느낌을 통해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사내를 올려다보며 울고 있던 여인”의 환각으로, 즉 예수시대의 비천한 여인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예수와 여인의 사랑을 다룬 서사구조의 전개는 당연히 유명한『다빈치 코드』의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소설은 못 읽고 영화만 보았는데, 댄 브라운의 작품이 추리기법을 동원한 화려한 대중소설임에 비해 정찬의 작품은 죽음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일종의 종교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큰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소설『유랑자』의 후반부에서 감동적인 것은 현재시점으로 돌아와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장례식과 씻김굿이다. 혼백의 사설을 통해 어머니가 왜 평범한 결혼생활을 못하고 신병을 앓다가 결국 강신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차츰 밝혀진다. 그것은 그녀가 여덟 살 때 겪은 끔찍한 경험, 즉 6•25전쟁의 무서운 상처 때문이었다. 소설은 이로써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굿의 과정이 섬세하고 실감있게 묘사되는 데 비하면 전쟁체험은 한 인간의 생애를 결정짓는 사건치고는 너무 암시적이고 소략한 편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정찬의 새 장편『유랑자』는 인간문명의 ‘파국적 형태’로서의 전쟁의 비극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드물게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잠든 의식을 깨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 <이달의 책>. 201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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