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갑우] 정치에 典範을 제시한 어느 출판사의 편집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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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12 12:28 조회24,6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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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典範을 제시한 어느 출판사의 편집 매뉴얼
“저술은 인간이, 편집은 신이 한다.”『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이하『매뉴얼』)의 2008년판 머리말에 인용된 미국작가 스티븐 킹의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2010년판 책의 뒤표지에도 이 진술 다음에, “저술은 때로 모험과 도전일 수 있지만, 편집은 언제나 100퍼센트 완성도를 향한 끝없는 노력”이라는 문장이 있다. 책을 생산한 편집자들이 책을 고르는 예비독자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자부심도 느껴진다. 책 만들기는 내용과 형식이 함께 가는 일이라는 선언을 보는 듯하다.
이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른다. 우리말 쓰기와 관련해 ‘작은 도움’을 주고자 한 개별 출판사의 이익의 ‘최소화’가 공공이익의 최대화를 결과하는‘구성의 진리’를 보여준다면, 최대화가 최소화를 만드는‘구성의 오류’를 정정하는 한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매뉴얼』이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띄어쓰기와 외래어표기법은, 읽기와 쓰기에 편집증적 사고를 하는 이들을 유혹한다. 한글은 두 주제가 쟁점이 되는 매력적 언어다. 서양언어는 단어를 단위로 띄어쓰기를 하면 된다. 일어와 중국어는 띄어쓰기 없이도 문장이 성립할 수 있다. 일어는 일상문자인 히라가나가 아니라 가타카나로 외래어를 표기하고, 중국어는 뜻과 소리에 어울리는 자신들의 한자조합을 만든다. 한글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으면 문장의 독해가 어렵고, 외래어를 고유의 단어와 구별해 주는 장치가 없다. 언어와 관련해 외래를 수용하는 방법과 형태의 차이는, 밖에 대한 한·중·일의 심층 무의식의 차이를 생산하는 기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매뉴얼』의 띄어쓰기와 외래어표기법은 ‘국가’-교과부, 문화관광부, 국립국어원-가 제시한 원칙과 더불어, ‘열린책’의 고유한 방침을‘병기’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즉 열린책은 국가에 순응‘만’하는 전략을 선택하지 않는다. 합성어와 관형사의 사례를 보자. 띄어쓰기와 외래어표기법의 원칙을 제공하는 국립국어원의 원칙은, “단어별로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단위별로 띄어 쓸 수 있다”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는 ‘국립국어원’으로 표기돼 있지만, 열린책은 ‘국립 국어원’으로 띄어 쓴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한글’에서는 국립국어원으로 쓰면, 붉은 줄을 긋는다. 적절하지 않다는 표시다. 합성어 전반으로 확장하면 더 복잡해진다. 국립국어원의 한글 맞춤법에는“전문 용어는 단어별로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쓸 수 있다”고 돼 있다. 『매뉴얼』은, “자립적인 두 단어가 결합하여 하나의 합성어로 굳어지면 띄어쓰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에 근거해, ‘복합 명사’는 띄어 쓰지만, 가두시위나 교통경찰, 자기광고와 같은 합성어는 붙여 쓴다. 그러나 교통 법규나 자기 과시는 띄어 쓴다. 어떤 합성어가 ‘굳은’상태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국어사전을 확인해' 보라 하지만, 스스로 말하듯 반복해야만 '익숙해진다.’ 외래어표기법에서는, 파열음 표기에 된소리를 쓰는 언어를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타이어, 베트남어로 국한하고 있는 국가의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러시아어 표기는 독자적으로 하고 있다. 국가의 ‘도스토옙스키’가 열린책에서는‘도스또예프스끼’다.
국가와 열린책보다 강한 파열음을 내는 출판사가 ‘창비’다. 창비는 합성어를 복합명사로 만든다. ‘외래어 표기법’이 아니라‘외래어표기법’이다. 관형어와 보조용언도 가능한 붙여 쓴다. 외래어표기법에서는 파열음의 된소리를 수용한다. 창비 ‘인문사회출판부장’염종선의 글, “이딸리아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창착과 비평>, 2011 겨울)는 그 이유에 대한진술이다. ‘이탈리아’가 아니라 ‘이딸리아’로 쓰는 이유는, 原音에 충실하려는 표기의 원칙 때문이다. 또한 외래어표기법의‘영어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기도 하다. 러시아어에만 된소리를 도입한『매뉴얼』도 외래어표기법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판단’을 한다. 국가가 제시한 외래어표기법을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나는, 어느 한편이, 특히 국가가 진리를 독점하는 듯한 모습이 적절하지 않다면, ‘민관협치기구’를 통해 용례를 축적하자는 염종선의 제안은, 살아 있는 생물인 우리말을 다듬는‘정치’의 한 전범이 되리라 생각하는 편이다.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남북한 국가의 차이도 또 다른 파열음의 원천이다. 북한의 ‘띄여쓰기’와 ‘조선어외 래어적기법’은 김일성·김정일의‘교시’와‘지적’의 대상일 정도다. 북한에서도 띄어쓰기와 외래어표기법이 쟁점이었다. 1954년 발행한「조선어 철자법」은, 예를 들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나 ‘김 일성’과 같은 ‘띄여 쓰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붙여 쓰려 한다(「조선문화어건설리론」, 2005). “불완전명사는 앞단어에 붙여쓰고, 적, 식, 형, 성, 용, 급과 같은 한자말이나 접미사가 붙은 단어는 그 뒤에 오는 명사와 붙여쓴다.” 예를 들어 ‘아는것이 힘이’고, ‘사회정치적생명체’다. ‘외래어적기법’은, “발음대로 적는다는 원칙과 더불어 인민대중의 언어생활상관습도 고려하”고 있다.「조선로동당언어정책사」 ( , 2005). ‘이딸리아’지만 ‘파마’도 쓴다. 또 하나 특징은, 1998년 9월부터“다른 나라의 이름과 수도이름을 제3국에서 부르는것처럼 부르는것은 민족적자존심에 저촉되는 결과를 가져올수있”다는 이유로, ‘인도’를 ‘인디아’로, ‘독일’을‘도이췰란드’등으로 바꾸어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아 한글로 작성하고 있는 이 글에서, 북한의 띄어쓰기와 복합명사, 외래어에는 상당수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의 한글정치만큼이나 남북한의 ‘우리말 정치’가 필요한 듯보인다.
『매뉴얼』에서 북한의 책까지를 일별하는 나의 글도, 『매뉴얼』도 ‘창비’도 아닌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오류가 있는 나름의 원칙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학연구자로서 이 원칙을 이론으로 표현할 능력은 없다. 염종선은 외래어표기법이 원주율 π의 근삿값 3.14를 찾는 일이라 했지만, 그도 지적하는 것처럼 π가 무한을 가진 무리수인 것처럼, 무한한 차이의 생산은 불가피할 수 있다. 띄어쓰기와 외래어표기법에서 발생하는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효율을 증진할 수 있지만, 그 방법과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경쟁하는 주체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효율이 소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열린 책’인『매뉴얼』이 우리말의‘아름다움’을 다듬어 가는 하나의 길을 열었다면, 그 길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정치도 미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교수신문, 2012.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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