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민중 이미지의 정치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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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25 14:13 조회28,7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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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이미지의 정치철학적 탐구
ㆍ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쓴 이는 김수영이었다. 시가 침을 뱉어야만 했던 더러운 시대에 스스로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긍정할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던, 아니 찾고 싶어 했던 그는 놀랍게도 ‘전통’을 입에 담는다. 다분히 낭만적 회고의 혐의가 짙은 이 거대한 뿌리에 대한 동경은 권력과 민중이 한 번도 행복한 동거를 한 적이 없는 한반도 남쪽의 반-섬나라를 긍정하기 위한 반전(反轉)의 전략이었다. 그에게 전통이란 진흙탕에서 나뒹구는 일상적 생활의 적나라한 삶 자체였고, 강제적인 서구적 근대화 이래 이 땅에서 진흙탕으로 범벅된 더러운 일상은 부정의 대상이었지 긍정의 장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김수영의 낭만적 회고는 파시스트의 지배가 언제나 의존하던 전통이라는 무형의 시간을, 그 지배가 결코 남김없이 집어 삼킬 수 없는 민중적 끈질김의 증좌로 탈바꿈시켜 진흙탕으로 끌고 내려옴으로써, 파시스트의 권력과 폭력이 결국에는 거대한 뿌리에 좌초하고 말리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런 김수영의 사유는 좀처럼 철학적 상관물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수많은 비평들이 거대한 뿌리의 역설적 이미지에 대해 열광적으로 말을 쏟아냈으며,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를 위해 소환되곤 했다. 그런데 아마도 한국에서 낯선 이름일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만큼 이 거대한 뿌리와 어울리는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반딧불의 잔존>(길)은 디디-위베르만의 첫 번째 국역본이며, 이미지 연구의 영역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온 저자의 정치적 사유가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1953년생으로, 리옹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히스테리의 발명 : 실페트리에르의 사진도상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리옹에서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으로 소속을 옮긴 이유는 그가 쓰려던 논문이 이른바 ‘미술사’ 분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리옹 대학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현재 기존 미술사 연구의 제도, 내용, 형식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그의 이력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박사논문을 간행한 처녀작으로부터 광기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에 대한 획기적 연구인 <잔존하는 이미지>(2002)까지, 디디-위베르만의 저작은 기존의 미술사 나아가 철학사의 탈구축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영역을 ‘예술’이 아니라 ‘이미지’라고 정의하는데, 예술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자족적이고 완결적인 행위-제작 영역이 아니라, 경계가 모호하고 다양한 힘들이 각축하여 생성되는, 그래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를 고유의 탐구영역으로 삼은 것이다.
<반딧불의 잔존>은 이런 그의 이미지 연구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철학과 조우한 저작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영화감독인 파솔리니로부터 현대의 문제적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까지, 그리고 그에게 언제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바타이유에서 벤야민까지, 그의 사유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현대의 정치적 전망에 대한 폭넓은, 하지만 신중한 타진을 거듭한다.
그의 논지는 명확하다. 파솔리니가 민중을 상징하기 위해 단테로부터 인용한 “반딧불”이 결코 절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관념적으로 상상된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는 슬로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딧불의 ‘잔존(survival)’을 역사의 계보로부터 추출해내는 일이다. 이는 그 자신이 밝히고 있듯 파솔리니나 아감벤이 두터운 고고학을 통해 다다른 비관적 묵시록을 전복시키는 일이며, 민중의 살아남음을 파시스트적 전체주의화에 맞서 붙잡아내려는 간절한 시도이다.
이 라틴적 ‘거대한 뿌리’를 이 땅의 ‘거대한 뿌리’와 어떻게 조우시킬까? 파괴적 경쟁에 내던져져 전체주의화되어 가는 이 땅의 현재에 한 번은 가늠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한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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