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샹하이, 일본, 한국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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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2-29 17:55 조회23,8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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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은 샹하이이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님들과 견문도 넓히고 공부도 할 겸 3박4일의 여정으로 서울을 떠났다. 마침 이 연재글 마감날이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인 오늘이라 늦은 밤 호텔방에서 키보드를 두둘기고 있자니 조금 처량한 느낌도 든다. 이 지면을 통해 맡은 임무가 일본의 오늘을 보며 여러 가지 단상을 조심스레 선보이는 일일 터이나, 샹하이에서 글을 쓰고 있자니 눈앞에 생생하게 잔영이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인상을 문자로 남기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오른다. 과연 일본 언저리로 이야기를 되돌릴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샹하이에서 출발하기로 마음 먹어 본다.
이 도시의 유구한, 혹은 짧은 역사는 동행한 중국학 전공 선배님들과 관광 가이드로부터 들었을뿐 아니라 다리 아프게 돌아본 샹하이 역사 박물관의 전시를 보며 많이 배웠지만 이상하게도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저 단편으로 뇌리를 스칠 뿐 시계열적으로 배열이 되지를 않는다. 낯선 곳에 와서 그곳의 지나온 시간 이야기를 들으면 연도와 사건으로 퍼즐을 맞추는 버릇, 아마 사지선다형 세대의 역사 교육이 뇌에 가한 테러라고 위로하며 그런 역사 이야기는 일단 패스하고 눈앞의 잔영에 집중하자.
일단 눈앞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크기, 그것도 압도적 크기이다. 서울, 오사카, 도쿄에서 20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질러 산 경험이 있기에 동아시아 대도시의 확장과 변모는 몸에 각인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샹하이의 압도적 크기와 접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도시 경험은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미국과 유럽의 대도시에도 적지 않게 발걸음 해봤지만 이런 식으로 규모가 큰 도시는 처음이다. 단지 넓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을 모두 빨아들일 듯한 깊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깊이는 최근 20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도시의 키를 한 층 높인 현대적인 고층빌딩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이 빌딩들을 겹겹이 에워싸며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오랜 건물들이야말로 깊이의 주역들인 듯 하기에 그렇다. 오래되고 남루하지만 여전히 이곳 사람들의 생활 터전으로 기능하는 다양한 건물들의 연속선 상에서만 고층빌딩들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즉 조계지의 멋진 건물들, 100년 가까이 된 남루한 건물들, 그리고 고층건물들은 샹하이라는 도시를 복합적으로 구성된 시간의 퇴적층으로 현전시키고 있는 셈이다. 넓이와 깊이가 어우러진 이 시간의 퇴적층이야말로 샹하이라는 도시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래서 도시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 따위는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 산보하면 겹겹이 쌓이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샹하이에서 역사는 도처에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것이지 박물관의 정리된 연대기 속에 얌전히 줄 서 있는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과연 이 퇴적층은 샹하이 ‘안에서’ 쌓인 것일까?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퇴적층이 샹하이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것일까? 아마도 샹하이의 역사가 퇴적층인 한에서 샹하이란 이 퇴적층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조계지화된 샹하이가 유럽-미국 제국주의와 격변기 중국의 만남 그 자체였고 일본 제국주의의 욕망 그 자체였던 한에서, 샹하이는 근현대 제국주의의 파노라마적 원-경험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샹하이를 거닐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것은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추체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럽과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는 각 국가의 문서고가 아니라 샹하이에 켜켜이 쌓인 스펙타클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샹하이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일본 이야기를 해보자. 얼마 전 나고야 시장이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는 망언을 ‘또’ 세상에 내뱉었다. 피곤도 하니 난징 대학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논쟁도 아닌 논쟁에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다. 또한 패전 후 일본의 역사인식이라는 동아시아의 골치덩어리를 본격적으로 논할 생각도 없다. 다만 망각이 망언으로, 책임 회피가 자기 미화로, 반성과 수치가 피해의식으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현재까지 일본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넘어가자. 야스쿠니 신사 내 유슈칸(遊就舘)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서사에도, 수많은 교과서에서 시계열적으로 배치된 사건들의 연쇄에도 일본의 역사는 없다. 일본의 어느 도시에도 스스로의 욕망이 빚어낸 영욕과 회한의 퇴적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도시는 어디를 가나 청결하다. 마치 고대로부터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한결 같은 생활세계를 지켜왔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난징에서도 일본은 깨끗해야 한다. 사무라이의 절제든 제국군의 절도든, 난징을 침략한 일본 군인들은 고대로부터의 무사도를 깨끗하게 실천했다고 믿어야만 영욕과 회한의 역사를 쓰는 일을 회피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샹하이라 이름 붙여진 퇴적층에는 그 영욕과 회한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에도 타이페이에도 오키나와에도 삿뽀로에도 쟈카르타에도 세월을 견디며 먼지 더미 아래 역사가 쌓여 있다. 일본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았다. 아니 쓰여질 수 없다. 이 퇴적층과 마주하여 자기 욕망의 원-경험을 수집하기 이전에는 말이다. 물론 그것을 수집하는 것은 일본인만의 임무가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샹하이에서 한국인이 근현대 일본의 자기욕망을 수집하는 일, 이런 일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서남포럼. 201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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