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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후쿠시마 그리고 1년 - <머튼의 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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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14 21:11 조회38,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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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이 핵무기와 핵전쟁에 관해 쓴 <평화론>(<머튼의 평화론>(조효제 올김, 분도출판사 펴냄))이 집필된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강대국 간의 핵전쟁과 인류의 파멸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미국의 일반 가정집 뒤뜰에 방공호를 파는 일이 유행처럼 되어 있었고, 방독면과 비상식량을 비축해 두는 것이 생활의 지혜처럼 여겨졌다.

 

1962년 쿠바의 미사일 사태 때 초등학교에 다녔던 어느 유럽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이제 곧 세상이 끝날 터이니 학교에서 죽는 것보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면서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켰다는 것이다.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그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고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개봉된 것이 1964년이었는데 그때 관객들은 이 블랙 코미디를 단순한 풍자극이 아니라 현실의 공포와 절망의 체념이 뒤섞인 심리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만큼 냉전 시대의 핵공포는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을 만큼 생생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쿠바 위기 외에도 핵 경보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자칫 핵전쟁이 발생할 뻔한 일촉즉발(close call) 사태가 여러 번 있었고, 훗날 대중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던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이렇게 일상적인 위기가 지속되었음에도 냉전 시절 핵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을 놓고 많은 역사가들은 아직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논쟁의 한 편에는 핵 대결의 논리적 기반이 된 '상호 확증 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천만다행(sheer luck)' 이론이 있다.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은 대결 상대자들이 대량 살상 무기로 서로를 공격할 경우 양측 모두 회복 불능의 파멸에 이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행위자라면 먼저 핵공격 단추를 누르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존 포브스 내시가 제안한 '내시 균형'이라는 게임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로가 상대방의 전략을 예측하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최적의 전략을 선택한 것이 상호 균형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냉전 초기에 미국의 핵개발 기술을 소련 측에 빼돌렸던 서방측 인사 중에는 포섭된 스파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내시 균형을 맞추고자, 다시 말해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핵공격을 막기 위해선 소련 역시 같은 수준의 억지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냉전식 대결론자나 군수 산업 장사꾼 또는 일부 유치한 이론가를 빼고 오늘날까지 상호 확증 파괴 전략 덕분에 냉전 시기 핵전쟁이 방지될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토마스 머튼 역시 MAD 억지 전략은 말 그대로 '미친(mad)' 주장에 불과하다면서 그것의 불가능성과 허무주의적 경향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대다수 역사가들 역시 MAD 전략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냉전 때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인류가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천만다행 설을 지지한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갈 점이 있다. 핵 대결이 단순히 보수주의자들의 전가의 보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대소련 봉쇄 전략을 제일 먼저 주창했고, 국제 관계론에서 현실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조지 케넌과 같은 대가는 미소 핵무기 대결을 앞장서서 반대했었다. 케넌은 자신의 봉쇄 전략이 어디까지나 정치·경제적 조치를 의도했을 뿐이고, 군사적 대결 또는 충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늘 강조하곤 했다.

 

진짜 고수는 함부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지 않는 법이다. 걸핏 하면 전쟁 불사론을 들먹이는 이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허약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무책임한지 그리고 이상주의까지 갈 것도 없이 제대로 된 현실주의 정도만 실천하더라도 얼마나 합리적인 상황 관리가 가능한지를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천만다행으로 냉전 시대는 핵전쟁 없이 막을 내렸고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냉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냉전 종식 직후 전 세계를 휩쓸었던 환호의 물결, 이제 드디어 평화와 공존의 막이 올랐다고 하는 벅찬 기대감은 금세 경제 지구화의 거친 물결과 9·11 사태 후의 전쟁 공포에 묻혀 버렸다.

 

포스트-냉전 시대를 국제질서의 황금기로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적어도 핵전쟁 위협에 관한 한 포스트-냉전 시대는 평화적인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아니, 평화적으로 '보였던' 시기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초강대국들의 핵 대결이 끝났고, MAD 전략이니 핵 군비 경쟁이니 스타워즈니 하는 말들이 역사책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양극화 시대의 핵 억지 전략이 영원히 종료되었다고도 했다. 핵무기 경쟁에 관한 한 지난 20여 년을 '역사의 휴가철'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 그만큼 핵무기 현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느슨해 졌고 이제 전면적인 핵전쟁은 과거지사라고 하는 낙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세상>(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내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핵무기를 정점으로 한 대량 살상 무기의 위험성과 불확실성은 어느 때보다, 심지어 냉전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다. 핵문제 전문가 론 로젠바움은 포스트-냉전 시기 핵무기 상황이 극히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여론이 천하태평인 점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고 꼬집으면서 인류가 핵에 대한 경각심에 있어 일종의 '사고마비'에 빠져 있다고까지 극언한다.

 

상황을 심각하게 봐야 할 이유는 많다. 우선 핵 보유국의 분포가 늘었다. 핵 테러의 가능성도 상존한다. 또 인도-파키스탄, 이스라엘-중동-이란, 북한 등 지역 갈등에 근거한 핵 문제가 언제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스펙테이터>의 보도에 따르면, 2007년 9월 6일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데이르-에즈-조르 핵시설을 폭격했던 사건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시리아의 오랜 우방인 러시아까지 가세하여 '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봉합되었다. (☞관련 기사 : We came so close to World War Three that day)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우리가 핵전쟁 공포를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은 아마 포스트-냉전 시대의 핵 경각심 '사고마비'가 빚은 집단적 부인의 심리 탓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지역적 핵확산 외에 미소 냉전을 상기시키는 강대국들의 행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2007년부터 TU-95, TU-160 등의 장거리 전폭기를 동원한 핵전략 비행을 재개했고 미국 역시 그에 상응하여 핵 대응 조기 경보의 수위를 높이고 철저하게 대응 요격 비행을 시행하고 중이다.

 

서로 대치하는 비행기들의 날개 사이 거리가 10미터 미만인 아찔한 장면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 2월 8일에도 일본 홋카이도 근해에서 러시아의 핵 전투 비행단에 대해 일본 자위대의 전투기가 근접 요격을 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우리가 사고마비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전 세계의 객관적인 핵상황은 이처럼 아주 위중한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다.

 

버락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던 노벨위원회가 수상 이유서의 맨 첫 줄부터 핵문제를 거론했던 것은 오바마가 딱히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해서라기보다 핵 문제의 화급성을 위원회가 그만큼 심각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이 높다. 이런 현실을 성찰해 본다면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대화의 진전은, 그것이 당장은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반도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다행스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을 말하자. 벤자민 프랑켈이 지적하듯이, 냉전 핵 대결의 특징이었던 양극적 확실성이 오늘날에 와서는 다극적 불확실성으로 대체되었다. 다극적 불확실성은 여러 차원의 리스크(위험), 비대칭적 위협, 전략과 전술의 혼재, 그리고 보복 타격의 예측 불가능 등의 특징을 가진다.

 

달리 표현하자면 냉전 시기의 핵 담론이 확신에 찬 단순한 미친 논리에 근거했다면, 오늘날의 핵 담론은 불확실하고 어수선하면서도 근거 없이 낙관적인 복합 논리에 기댄다는 특징이 있다. 이 둘을 꿰뚫는 공통 분모는 고수위의 위험성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인간 이성의 한계,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기술—그것이 핵무기이든 핵 발전이든—에 대한 의존이 근원적인 차원에서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광기의 논리이고 죽음의 윤리다. 20세기가 낳은 두 가지 극단적인 근대의 모순, 즉 핵과 제노사이드는 서로 내재적으로 연결된 단일한 차원의 문제(nuclear genocide)라는 점을 자각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으로 맞서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다. 신학자였던 머튼의 경고를 들어보자.

 

도덕적 진리를 방기하고, 수억 명의 인류가 무참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 현실적 권력관계로만 보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도덕적-인간적 가치의 수호자로 생각해야 하며 자신의 명확한 기준 설정과 논리 개발에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

 

머튼의 호소가 특정 종교를 넘어 생명과 평화를 갈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현실을 우리는 오늘날 후쿠시마에서, 월성에서, 영변에서, 강정에서, 중동에서 분명히 목격하고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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