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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스윙 - 여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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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06 14:18 조회26,0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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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물을 끓이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시 26분 37초,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초.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시 26분 54초,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커피잔이 놓여 있는 가장 유명한 시적 풍경은 엘리엇의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프루프록의 사랑노래') 엘리엇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스푼으로 삶을 재는 것보다는 커다란 국자를 든 시인의 우아한 스윙이 더 좋군요. 스포츠는 잘 몰라요.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뭔가 안 풀릴 때는 포즈를 취한다면서요? 우산이든 볼펜이든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지 스윙. 삶은 내가 타자일 땐 헛스윙이 나고 투수나 수비수일 때 늘 가장 정확하고 멋진 스윙을 보여줍니다. 우리 좌익수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저 운명의 홈런. 오늘 오후도 마음 어디쯤에 불이 나고 구멍이 뚫릴지 모르겠어요. 바로 그때 필요해요. 국자 속의 슬픔을 쏟아버리고 다시 또 스윙-.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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