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투표일에 생각하는 제도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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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11 22:33 조회27,49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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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자가 결정한다. 미리 결심해 둔 의지파가 있을 테고, 아침에 일어나 사정을 봐 가며 들르든지 말든지 하겠다는 기회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라 한다. 투표를 민주주의의 향연으로 여기며 선거 기간 동안 너나할 것 없이 서로에 대한 비방을 표현의 자유의 드라마틱한 가치로 즐겼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아니다.
전혀 다른 풍경도 있다. 우리가 있는 곳과 대척점 가까이에 있는 남미의 몇 나라가 그렇다. 우선 투표일은 평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유권자를 유인하는 게 아니라 일요일로 한다. 일상의 업무 때문에 투표를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단순하고도 원칙적인 발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투표는 일요일을 맞는 자신의 기분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의무로 부과되어 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사정을 밝혀야 한다. 배심원으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나갈 수 없을 때 사유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것도 민주주의다. 도식적으로 보면, 투표를 권리로 파악하느냐 의무로 받아들이냐의 차이다. 그렇지만 권리 속에는 의무가 포함돼 있고, 의무 안에도 권리가 들어 있다.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외형이나 실질이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주의에서는 권리의 관념을 찾아보기 힘들고 모든 것이 시민의 의무였다. 오래된 것이라고 옳거나 나은 것은 아니지만, 따지자면 남미의 투표제도가 민주주의의 원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모두 민주주의거나,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만큼 다양하다는 증거인 동시에, 우리는 여태 민주주의의 본질조차 명확히 해 두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냥 습관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라면 불가침의 절대선으로 받들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투표제도는 그렇다 치고, 오늘 투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누구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되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이거나 의무인 투표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의 정치 대리인을 선출하는 제도화한 관습이다. 임기를 정해 개인의 대리인이 아니라 지역의 대표자로, 구체적 일거리를 맡기는 게 아니라 포괄적인 책임과 권한을 부여할 인물을 선정한다. 그것이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에서 헌법에 못박아 민주주의 핵심의 하나로 여기는 대의제다.
국회의원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는, 국회의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또 해야 하느냐에 따라 기준을 정할 수 있다. 그 기준을 정치 교과서처럼 세세하게 따지는 일은 다른 시간에 할 일이다. 투표일 아침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최소 기준으로 거른 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국회의원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따질 때는 요란하다. 전문성, 청렴성, 도덕성, 고도의 정치적 감각, 지도력, 국제적 정세 판단력, 활동성, 성실성 등 끝없이 늘어 놓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인물이 우리 주변에 혹은 지구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우리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을 찾아내야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저 일정 기간 동안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맡아 책임 의식을 가지고 활동할 만한 평범한 인물을 고르는 일로 알아야 한다. 최악의 인간형만 피하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나의 주권 위에 군림할 정치가여서도 안 되겠지만, 국회의원을 비유의 차원을 넘어서서 진짜 나의 심부름꾼 정도로 여겨서도 곤란하다. 투표를 통한 정치적 계약관계에 있는 대등한 당사자로 대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선거는 영웅을 선발하는 일도 종복을 고용하는 일도 아니다. 나와 비슷한 이웃 중에 권리보다는 의무를 기꺼이 감수할 사람을 찾아 정치를 의뢰하는 습관적 제도다. 그렇게 너무 무겁지도 또 가볍지도 않게 생각하고 투표장에 나가는 게 좋겠다.
차병직 변호사
(한국일보. 201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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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님의 댓글
백낙청 작성일댓글달기 칸이 여기도 있는 걸 처음으로 알았네요. '강수'라고 한마디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