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벽돌의 시간 - 김중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23 13:19 조회25,188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날
나는 낮과 밤의 매우 비좁은 틈새로 스며들다가
새벽이나 저녁처럼 증발했고
그날도 나는 사라지고자 벽돌을 구웠지
잘 구워진 벽돌들은 안전한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목격한 게 없다는 얼굴을 하고
등 뒤에 나를 숨겨주지
그 등
그 뒤
그 먼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잖아
거리에는 방금까지 뜨겁게 구워졌던
차가운 벽돌들만이 가득하네
새벽 속에 은신한 저녁이나
저녁 속에 숨은 새벽에만 벽돌은 구워지지
단단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책들은 해를 삼키고
해는 벽돌을 뱉어내지
별이 지네 새가 날고 하늘에선 고양이가 떨어져내리지
나를 추격하던 황혼의 악당들이 탄 자동차가
벽돌 앞에서 푼돈처럼 구겨지네
나는 벽돌들의 넓은 등 뒤에
숨죽여 숨네
이유 없이 어둑어둑 아득한
그 등 그 뒤 그 먼 그 하루의 하루
혈관 속의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흐르는 벽돌의 시간
아무것도 쌓을 수 없는 시간들만
내 몸속 어딘가에 쌓이네
그래요 맞아요. 아무것도 쌓을 수 없는 시간이 자꾸 몸 속에 쌓여요. 그렇게 벽돌이 쌓여갈수록 점점 서글퍼졌지요. 그럴 때마다 항상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이 구절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번에는 이것이 전부인데, 충분치가 못하다. 하지만 이것이 아마 너희들에게 말해주겠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집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벽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꼭 닮았다." 언젠가 우리의 집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지금은 차가운 벽돌뿐이지만. 김중일 시인님, 그런 날을 믿으세요? 우리가 사랑하는 낙관주의자 브레히트의 넓은 등 뒤로 숨어보아요. 그 등, 그 뒤, 그 먼… 집.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5. 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