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학벌 컴플렉스와 후광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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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08 11:44 조회25,6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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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외부 모임에 나가 인권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가끔 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이들의 솔직한 속내를 접하게 된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공통적인 점이 있다. 내색을 잘 안 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수많은 정신적 스트레스, 특히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학벌 콤플렉스가 나타나는 양상은 대단히 복잡하고 주관적이다. 지방학생은 수도권 대학에 대해, 수도권은 '인 서울' 대학에 대해, 서울 내에선 스카이 대학에 대해, 비 스카이 대학들 사이에선 10위권 대학진입을 놓고, 10위권 바깥에선 신흥대학이 전통 명문대에 대해, 분교는 본교에 대해, 자기 학교 내에선 입학성적이 낮은 학과가 높은 학과에 대해…끝없는 열등감의 사슬이 얽히고 설켜 있다.
어릴 때 구루병을 앓아 고통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학문적 열정으로 승화시켜 열등 콤플렉스 연구의 대가가 된 알프레드 아들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도 열등감의 표현이다." 결국 자기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병적으로 학벌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개인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압박을 생각하면 이 문제에 어찌 민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학생들이 학벌 콤플렉스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선 학점을 잘 따려고 한다. 그래야 다른 대학으로 편입할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펙관리에 신경을 쓴다. 외국어 학습이나 자격시험, 인턴경력은 기본이다. 대학원 진학도 고려한다. 이때 1차적 고려는 해당 대학원이 상위권 대학에 있느냐 여부다. 일종의 학벌 세탁이다. 해외 연수도 요즘 부쩍 늘어난 선택이 되었다. 외국 유학도 적극적으로 고민한다. 심지어 학부 때 일찌감치 국내 대학을 포기하고 외국 대학의 학부 과정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콤플렉스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깊은 원인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은 외형적인 보상이나 성취가 있으면 있을수록 자아의 가치 상실이라는 2차적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젊은이들을 좀먹고 있는 학벌 콤플렉스를 타파할 혁명적인 방법이 있는가.
지금까지 제도적인 개선책은 많이 제시되었다. 대학의 서열구조를 변경시키는 게 핵심이다. 더 나아가 경쟁방식이나 철학적 접근방식도 제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꼽아보자. 안철수 교수는 학벌 콤플렉스에 대한 직접적 해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정의로운 경쟁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편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의 요소로서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하는 것, 경쟁할 때 반칙이나 특권이 없는 것, 패자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을 꼽는다. 신영복 교수의 해법은 훨씬 더 발본적이다. 그는 중심과 변방을 나누면서, 중심부는 대단히 매력 있게 보이지만 낡은 구질서에 불과하므로 그것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낡은 것을 냉철하게 각성하고 그것과 과감하게 결별하면서 중심이 아닌 변방 자체의 '변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때 그 변방은 진정한 창조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정한 경쟁논리와 심오한 철학적 논리, 이 둘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현실적 해법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을 순수하게 결과 중심으로만 평가하는 것이다. 새로 개발된 약의 효과를 평가할 때 연구자든 피실험자든 무슨 약을 쓰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약효를 정확히 판정하기 위해 '이중맹검법'을 사용한다. 가장 과학적인 방식이다. 적절한 인재를 찾을 때도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후광효과나 플라시보 효과를 일절 배제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범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람의 평가방식만 개선되어도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고통과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눈에 띄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국일보, 2012. 6. 6.)
어릴 때 구루병을 앓아 고통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학문적 열정으로 승화시켜 열등 콤플렉스 연구의 대가가 된 알프레드 아들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민감한 것도 열등감의 표현이다." 결국 자기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병적으로 학벌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개인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압박을 생각하면 이 문제에 어찌 민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학생들이 학벌 콤플렉스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선 학점을 잘 따려고 한다. 그래야 다른 대학으로 편입할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펙관리에 신경을 쓴다. 외국어 학습이나 자격시험, 인턴경력은 기본이다. 대학원 진학도 고려한다. 이때 1차적 고려는 해당 대학원이 상위권 대학에 있느냐 여부다. 일종의 학벌 세탁이다. 해외 연수도 요즘 부쩍 늘어난 선택이 되었다. 외국 유학도 적극적으로 고민한다. 심지어 학부 때 일찌감치 국내 대학을 포기하고 외국 대학의 학부 과정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콤플렉스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깊은 원인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은 외형적인 보상이나 성취가 있으면 있을수록 자아의 가치 상실이라는 2차적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젊은이들을 좀먹고 있는 학벌 콤플렉스를 타파할 혁명적인 방법이 있는가.
지금까지 제도적인 개선책은 많이 제시되었다. 대학의 서열구조를 변경시키는 게 핵심이다. 더 나아가 경쟁방식이나 철학적 접근방식도 제시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꼽아보자. 안철수 교수는 학벌 콤플렉스에 대한 직접적 해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정의로운 경쟁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편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의 요소로서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하는 것, 경쟁할 때 반칙이나 특권이 없는 것, 패자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을 꼽는다. 신영복 교수의 해법은 훨씬 더 발본적이다. 그는 중심과 변방을 나누면서, 중심부는 대단히 매력 있게 보이지만 낡은 구질서에 불과하므로 그것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낡은 것을 냉철하게 각성하고 그것과 과감하게 결별하면서 중심이 아닌 변방 자체의 '변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때 그 변방은 진정한 창조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정한 경쟁논리와 심오한 철학적 논리, 이 둘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현실적 해법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을 순수하게 결과 중심으로만 평가하는 것이다. 새로 개발된 약의 효과를 평가할 때 연구자든 피실험자든 무슨 약을 쓰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약효를 정확히 판정하기 위해 '이중맹검법'을 사용한다. 가장 과학적인 방식이다. 적절한 인재를 찾을 때도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후광효과나 플라시보 효과를 일절 배제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범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람의 평가방식만 개선되어도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고통과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눈에 띄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국일보, 201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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