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 생리 멈춘 여성들, 의사는 왜 침묵하는가?(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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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12 16:10 조회22,9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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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멈춘 여성들, 의사는 왜 침묵하는가?
[프레시안 books] 케런 메싱의 <반쪽의 과학>
2012년 4월 10일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근무 경험 여성 노동자의 혈소판 감소증 및 재생 불량성 빈혈에 대해 첫 산업 재해 판정을 내렸다. 업무와 질병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재생 불량성 빈혈 등 혈액 관련 질환으로 산재 신청한 노동자는 총 스물두 명이지만 이 중 단 한 명도 산재로 인정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공단의 이번 결정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앞서 지난해 6월 서울행정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등 두 명에 대해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며 산업 재해를 인정했을 때에도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었고, 삼성 측 역시 "삼성 노동자들의 백혈병은 직업병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산업 재해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뚜렷하게 외상이 남는 사고성 재해가 아닌 질병의 경우에 업무와 질병 사이의 관련성을 입증하여 보상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백혈병이나 뇌종양쯤 되는 '중대한' 질병조차 산업 재해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이다 보니, 여성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리 불순 정도는 이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한 시점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나 드러날 뿐, 그 자체로는 문제 제기할 분위기가 되지 못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물질들이 생식 계통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혈액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고 경험자가 많으므로 입증하기도 쉽지만, '단순한' 생리 불순의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반도체 공장 오래 다닌 여성 노동자들은 불임이 많다는 속설 때문에 반도체 공장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숨기기도 하고, 1995년 경남 양산 솔벤트-5200을 취급했던 남녀 노동자들에게 집단 불임이 발생하였을 때도 특히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한 여성 노동자들의 증상을 추적 조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산이나 조산, 사산을 경험하는 경우에도 임신·출산과 관련된 문제는 아예 산업 재해로 인식되지 않곤 한다. 2000년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우울증을 산업 재해로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산업 재해는 주로 생산직 남성 노동자가 경험하는 사고성 재해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고 아직까지 임신·출산 관련 질병이 산재로 인정된 적은 없는 것이다.
결국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직업과 질병의 관련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어려움 외에도, 여성의 특성에 둔감한 의학과 과학의 문제, 사회가 산업 재해를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인 편향의 문제, 여성에 대한 사회 문화적 낙인과 차별의 문제 등과도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삼성반도체의 경우와 같이 여성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가 주목을 받는 경우에도,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을지언정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특성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관심이 없으니 객관적인 자료도 없고, 객관적인 자료가 없으니 정책적 개입을 하려고 해도 근거가 없으며 방향을 설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물론 여성 노동과 건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분야의 현실이 절대적으로 척박한 것만은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과 건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 앞서가고 있는 캐나다의 사례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반쪽의 과학>(케런 메싱 지음, 정진주·김인아·김재영·김현주·이종인·전희진 옮김. 한울 펴냄)의 번역 발간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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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쪽의 과학>(케런 메싱 지음, 정진주·김인아·김재영·김현주·이종인·전희진 옮김. 한울 펴냄). ⓒ한울
<반쪽의 과학>의 저자들과 역자들은 모두 '이제까지 여성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은 노동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지 않았고, 노동 건강 혹은 직업 건강 분야에서는 여성의 차이를 보지 않아 일하는 여성들의 건강 문제는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 일하는 여성들의 건강 문제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성 건강에 대한 논의는 크게 여성의 몸에 대한 의료화를 비판하는 하나의 축과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여성 건강을 취약하게 한다는 건강 불평등 비판이라는 또 다른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말하자면 어떻게 그 이전에는 질병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많은 영역, 특히 여성의 임신 출산과 관련된 분야가 의사의 처치 대상이 되었나, 혹은 비정규직 여성들이 정규직 남성, 혹은 정규직 여성에 비해 건강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등을 밝히는 연구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의의를 여성의 일과 건강의 관계에 대해 처음 주목했다거나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사이의 차이에 처음 관심을 가졌다는 차원에서 찾는 것은 곤란하다.
이 책의 핵심적인 기여는 질병과 직업 사이에 존재하는 '객관적' 근거를 제공해온 산업 의학, 직업 보건이라는 과학의 세계 자체를 젠더적 관점에서 해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과학의 이름으로 생산되어 온 건강에 대한 지식들이 어떤 식의 잘못된 근거에 기초하여 생산되곤 하였는지, 또 어떤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 그래서 왜 결국 일하는 여성들의 직업 건강 현실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다루고 잘 보여준다는 데 이 책의 강점이 있다.
흔히 젠더 연구라고 하면 사회과학적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직업 보건학의 세계에서는 일부가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룰지는 몰라도 여성학적인 논의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과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과학자들이 다루는 개념이나 모델에 이미 많은 사회적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등이 반영되어 있으며 직업 건강에 대한 생의학적인 연구를 잘하기 위해서도 한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사회적 존재로서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사회적인 존재로서 여성들은 어떠한 문화적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지, 노동자로서 여성의 위치는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 임신과 출산, 양육을 수행하면서 여성들은 언제 노동 시장에 진입하거나 이탈하게 되는지, 작업장에서 여성들은 실제로 얼마만큼 남성들과는 다른 일을 수행하는지 등등,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직업 건강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내놓는 과학적 지식 자체가 제대로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반쪽의 과학>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경계의 탈피, 과학적 사실에 내재된 불확실성과 인과 관계 설명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가는 시대에서도, 유독 여성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반성이 적다는 게 저자와 역자들이 함께 지적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여성의 건강과 노동 환경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었고, 직업 건강에 대한 연구 역시 남성, 대규모 사업장, 제조업 중심으로 반복 노동이나 감정 노동 종사자가 많고, 근력과 신장 등 신체적 조건에 차이가 나는 여성 노동의 특성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진행되어 왔다.
<반쪽의 과학>은 여성 노동 현실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쯤으로는 전문가적 권위가 별반 손상되지도 않는 현실에 때로는 좌절하고 분노하면서도 여성 노동 현실에 기반을 둔 건강 연구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노동 현장과 정부 정책을 변화시켜 가려는 노력의 기록이다.
<반쪽의 과학>이라는 제목이 의도한 바는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다루어 온 직업 건강 분야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보지 못한 외눈박이였다는 사실이지만, 사실 한국에서 직업 건강 분야의 현실과 노동 건강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생각해 보면 과연 나머지 한 눈은 있다고 할 수나 있는 건지, 책 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산재 보험을 비롯하여 성별 분리 통계가 시급한 현실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국민건강보험 통계 자체도 직업별로 세분화되어 있지 않아서, 예를 들어 특정한 직업군이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 통계를 내기도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관심이 없으니 자료도 없고, 자료가 없으니 무엇을 개선해 보려고 해도 방향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반쪽의 과학>의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캐나다의 경우, 일반적인 직업 건강 분야가 먼저 발전하고 이어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학자들이 여성 노동 분야를 연구하고 개선해 왔지만, 반드시 선후 관계로 일반적인 직업 건강의 영역 분야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만 비로소 여성 노동 분야에 대한 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반쪽의 과학>을 번역한 역자들이 일하는 여성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쏟는 열정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에서 노동 건강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이 높아지고 관심과 변화를 향한 노력이 뜨겁게 일어나리라 믿고 싶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
프레시안, 201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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