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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네거티브 선거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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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20 23:36 조회23,6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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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싸움이고, 그 목적은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싸움의 무기는 무엇인가. 흔히 정책 대결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의 이념이나 정체성을 바탕으로 후보자의 정책으로 싸우라는 것이다. 정책이 현실적으로 유효한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지역구민의 복지를 위하여,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기 위하여,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정책을 마련한다는 데에는 모든 후보자들이 일치한다. 정책의 큰 줄기에 결정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근본적 차이보다는 취향의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유권자의 환심을 살 만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상대방의 공약을 슬쩍 변형하거나 아예 그대로 가져오기도 한다. 좋은 일을 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따라서 선거철 후보들의 공약만 모아보면 그보다 멋진 복음서도 없다.


그러니 정책은 그다지 성능이 좋은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할 수도 없다.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동원하는 방법은 상대의 허점이나 약점을 노리는 일이다. 어떻게든 흠 잡을 만한 일을 캐내고, 그것을 가능한 확대하고, 진위 논란에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바로 네거티브 전략이다.


아무리 남을 헐뜯는 일이라도 명예훼손처럼 범죄 행위에 해당하거나 다른 선거법 규정에 위반하지만 않으면 된다. 오히려 관심도 끌고, 사소한 일도 쟁점화하여 역동적 분위기까지 즐길 수 있다. 꽤 효과적 방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거듭 경험하였듯, 구체적 선거는 정책 싸움에서 시작하여 네거티브 싸움으로 변질하고 만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선거전의 기억을 되살려보자. 대체로 유권자는 누구를 찍을 것인지 사전에 결정하고 있다. 정책보다는 후보자가 속한 정당 또는 정치 세력의 이념적 성향, 후보자 개인의 지명도나 호감도에 따라 미리 결심해버리기 때문이다. 흔히 부동층을 거론하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이나 여론조사 결과는 일말의 예측에 불과하고 실제 큰 의미는 없다. 부동층은 존재하더라도 투표장에 나갈 가능성이 낮으며, 그 중 현실화하는 표가 당락에 영향을 미칠 확률은 더 낮다.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애당초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 중 몇 사람이 투표하느냐다.


그러므로 네거티브 전략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크다. 상대 후보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자기편끼리 동류적 쾌감을 느낀다. 공방을 거듭하는 가운데 네거티브 공세는 점점 거세어지고, 같은 편 유권자들의 내부 결속은 강화된다. 마찬가지로 상대편의 불쾌감과 반감은 더 커진다. 이렇게 쾌감과 결속, 불쾌감과 반감을 서로 끊임없이 교환적으로 경험한다.


다행히 선거운동은 기간이 정해져 있어, 투표일 전에 모두 끝난다. 투표 결과 당선자가 확정되면, 선거 싸움은 잊혀야 한다. 정상적 선거문화라면 패한 후보자나 그 지지자가 "안타깝고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선된 사람도 그런대로 잘 하겠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두고보도록 하자.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라는 정도로 생각해야 옳다. 하지만 네거티브 선거전의 풍토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서로의 감정만 극도로 자극하다 보니, 정반대로 패배의 굴욕감 때문에 낙선자측의 반감은 적개심으로까지 비화한다. 따라서 선거가 끝나고 나면 싸움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선거 때까지 새로운 양상의 전선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네거티브 선거전의 폐해다. 이런 선거전은 승자를 위해서도 패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국가라면 공동체의 이성이나 헌법을 정점으로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통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더 곤란한 폐습이 있다. 이런 네거티브 운동은 누가 행하며, 누구의 책임인가. 후보자 자신일까, 아니면 그의 운동원들일까. 모두에게 책임이 분산돼 있겠지만, 실제로 가장 효과적인 네거티브 운동에 앞장서는 몰지각한 주체는 선정적 보도에 눈먼 언론이다. 네거티브 선거전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누가 어떻게 해야 잘못된 풍토를 고칠 수 있을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차병직 변호사
(한국일보. 201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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