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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중국, 아는 만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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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30 13:56 조회30,6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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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올해는 그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 한국에서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으나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한중관계가 현정부 들어서 냉랭해진 탓도 있겠지만, 총선과 대선이라는 워낙 큰 이슈에 밀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연구자인 필자는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중국이란 대상과 그것을 보는 인식 주체(의 시각)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3백만 부를 돌파했다고 하는 『나의 문화유산 탐사기』 덕에 유명해진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을 보다보면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새기고 싶다. 이 뜻은 우리가 남의 나라를 보는 데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래서 대외인식은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이 상호침투하는 동태적 과정이라고 필자가 전부터 말해온 것이다.

 

이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내는 이유는, 우리의 중국 인식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상국' 또는 ‘대국’으로 본 전통적인 중국관이 청일전쟁으로 추락한 이래 우리의 중국 이미지는 ‘천한 중국’, ‘개혁모델로서의 중국’ 및 ‘세력균형의 축’이란 세 유형이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형되면서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것으로 필자는 해석하는데, 이것은 바로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최근 우리 지식인사회 일각에서 중국모델론이 오늘의 중국은 물론 내일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길잡이로서 흥미를 끄는 가운데, 특히 충칭(重慶)모델이 열띤 쟁점이 되었다. 만일 충칭에서 진행된 제도적 실험 속에서 우리 사회의 장기적 발전방향의 시사점을 찾고자 하는 시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개혁모델로서의 중국’의 재현에 해당된다.

 

그런데 지금 충칭모델의 핵심적 추진자인 뽀시라이의 실각에 이어 각종 추문이 떠돌면서 그 미래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그렇다면 해외 인사들이 적극적 관심을 갖고 소개한 충칭모델은 ‘알고 싶은 것’이 주도한 나머지 그 실상과 거리가 멀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필자가 지난 3월말 연변대학에 들렀다가 들은 바로는 학생들 가운데 뽀시라이의 정책을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작지만 나타났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난 50대 교수는 그 정책은 좋은데, 문혁을 연상시키는 대중동원 문화(이른바 紅色文化)나 불법적 체포방식이 반발을 샀다고 했다. 또 4월 말 샹하이에서 이야기 나눈 한 젊은 교수는 부패나 범죄조직과 싸우고 서민의 생존권에 대한 보호를 제창한 것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접촉 범위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대국굴기의 부작용으로 시달리는 중국 안에 충칭모델의 단기적 효과에 대한 일정한 지지가 있고 그에 대한 논란이 인터넷상에서 전개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교수가 궁금해 한 ‘그 목적’을 확실하게 짚어주는 발언이 원로학자 첸리췬(錢理群)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공산당이 개혁의 영도권을 반드시 장악하고 당의 집권당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성장한 홍위병 세대, 특히 혁명 고위간부들의 자녀가 중심인 ‘노(老)홍위병’들이 지금 군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지도층으로 활약하며 기득권층의 핵심을 이뤘는데, 그들이 여러 파벌을 형성하며 각자의 주변에 참모들을 불러모아 미래 중국의 정치적 방향을 연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정치·사상·문화적 동향으로서 그 속에는 다양한 입장이 분포되어 있다. 즉 노동자· 농민이 사회기초임을 강조하는 좌파적 이상주의로부터 중국모델론이 특수주의에 빠져 위험하다고 비판하며 계몽주의의 보편가치를 주창하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체제위기를 극복할 ‘공산당의 집권세력으로서의 지위’ 유지이다.

 

첸 교수의 이런 논평은 해외에서 중국의 오늘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논의할 때 신중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특히 중국모델론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이,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에서 균형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그 중요성은 일본 지식인들의 중국 민주화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 관한 글(서울대 일본학연구소,『일본평론』, 6호, 2012)을 얼마 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중국/대만문화 전문가인 마루까와 테쯔시(丸川哲史)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뽀(劉曉波)가 경제문화적 측면에서 이미 신자유주의 국가가 된 중국에 눈을 감고 서방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는 중국의 ‘민주’의 질을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내부의 시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중국에서의 ‘민주’의 전통은 근원적으로 ‘생존권’과 그를 보장하는 분배구조의 재설정과 관련된 것이자 민족주의와 짝을 이룬 것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일본사상사 전문가 코야스 노부꾸니(子安宣邦)는 일본 지식인들이 공산당 독재의 정치상황이 중국의 미래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류샤오뽀의 문제에 침묵하는 마루까와 같은 일본 지식인들을 나무란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중국인식의 특징을 전후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에서 파생된 ‘인민중국의 특권화’ 풍조 탓으로 설명한다.

 

류샤오뽀의 문제는 대만 지식인사회에서도 분열을 가져온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박노자가 그를 비판한 글이 아주 작은 파란만 일으켰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각자가 발언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알고 있는 중국’과 ‘알고 싶은 중국’이 상호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국을 인식할 때 끼어드는 이 ‘상호침투 과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려 들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법론적으로 적극 성찰해야 한다. 즉, 중국이란 대상과 그것을 보는 인식 주체의 관계에서 중국과 한국 (또는 일본 등) 두 사회의 각 주체에게 제각기의 주체적 목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체간에 ‘공동주관성’(곧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성립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참다운 중국 인식이 가능해지고, 중국과의 진정한 연대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위에서 본 마루까와와 코야스가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서로 일치하는 면도 있다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중국이 자기혁신을 함께 함으로써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코야스가 주장하는데, 마루까와 역시 일본 자신의 ‘민주’에 실천적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중국의 ‘민주’에 대해 운운할 자격도 없다고 말한다.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우리도 한번 깊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1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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