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적과 친구 - 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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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25 16:20 조회35,7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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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두꺼비가 피 묻은 단도를 물고는
펑, 하고 사라져 버리길
저의 죽음이 예고된 봉인 편지를
제 발로 신속하게 전달하게 하는 일
증오에서 뽑아낸 피의 잔을 어처구니없이 엎지르고 나서
훔친 보석을 선물하곤 답례를 기다리는 일
한손으로는 유리공처럼 텅 빈 구원을
나머지 손으로는 돌멩이 같은 단단한 파멸을 바라면서도
기도의 내용을 감추는 일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만 알리는 일
서리 낀 창가에 서서
봄이 막 도착한 정원을 파헤치라고 명령하는 일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모욕하고는
그걸 견디는 당신이라야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벨레로폰은 정말 미남청년. 아르고스의 왕비가 반해서 사랑을 고백했는데 거절했대요. 정념에 정신을 잃은 왕비는 그를 증오합니다. 이웃나라 왕에게 편지를 지참한 자를 죽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벨레로폰 편에 보냈지요. 우편은 항상 우편배달부의 죽음을 욕망한다는 것. 이런 걸 벨레로폰 효과라고 부릅니다. 모든 은밀한 우편배달, 정념의 메시지에는 이런 벨레로폰 효과가 들어있어요. 내 마음을 사랑과 우정이 적힌 편지라 믿고서 당신에게 전했는데 날 죽이실 작정인가요? 나는 당신의 동지인가요, 적인가요? 내가 연인인가요, 적인가요? 우리가 부부인가요, 원수인가요? 잘못 배달한 내 탓인가요, 제대로 배달한 내 탓인가요?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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