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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훔친 사과 - 윤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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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27 11:22 조회24,2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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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 파, 아파가 아빠로 들려
아버지 몸져누운 방에서
새파랗게 날 선 칼을 든다.
투명한 과일이 열린다.
아버지 눈가의 과일을 훔쳐
손안에 쥐고 서걱서걱
멋없이 깎아
아버지 모르게 먹는다.
베어문 사과,
시력을 잃은 눈동자가 씹힌다.

 

그렇군요. 이브가 훔친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신의 눈동자였습니다. 뱀의 꼬임에 빠져 이브가 열매만 안 땄더라면 하느님 아버지의 눈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밝고 밝으셨겠네요. 그랬더라면 그 좋은 눈으로 늙어가는 사람의 주름도 보시고 배고픈 아이의 입술도 보시고 학대 받는 이의 슬픈 눈빛도 보셨을 텐데. 그러면 아무도 안 늙고 안 굶고 안 죽어갔을 텐데. 이브와 아담이 훔쳐온 사과를 다 먹어 치워 하느님은 아무것도 못 보시고, 세상은 계속 아프고 배고프고 슬프게 죽어가나 봐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안 보이면 잘 들린다는 것.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신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유하나 봅니다. 안 보이시는 하느님, 하지만 잘 들어주시는 하느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진 기도는…… 그건 다음 시에서 말씀 드리지요.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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