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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영남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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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4-10 09:35 조회25,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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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특정당 일색 도시발전 없다”

“출세한 서울TK가 진정 大邱 위해 뭘 했나…특정黨 일색땐 도시발전 없다”

대구가 정치적으로 보수라고 하지만 원래는 진보의 아성…

정전 60주년인 내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노태우정부서 추진한 남북연합 실현해야

햇볕 아닌 찬바람으로 北붕괴 주장하는 건 南실력 과장한 억측

역사상 압박해 무너진 공산정권은 없어

 
‘어른’이란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어른 앞에 ‘시대의’란 수식어를 붙이면 ‘시대를 대표하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등이 해당된다. ‘지성’도 마찬가지다. ‘지적인 사고에 근거해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성질’이란 사전적 의미를 가진 ‘지성’앞에 ‘시대의’를 붙여도 ‘시대를 대표하는’이라는 뜻이 된다. 김준엽, 리영희 교수 같은 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 인물 모두 최근 몇 년 사이 세상을 떠났다. 그럼 ‘이 시대의 어른과 지성’은 누구일까.

백낙청(74).

그를 ‘이 시대의 어른과 지성’으로 지칭한다면 과한 표현일까. 1970~80년대 대학을 다녔던 학생과 지식인 치고 그가 발행한 ‘창작과 비평’을 한 번이라도 접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창비’는 당시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했다. 그는 평론가, 사회사상가로서 시대의 양심과 지식인의 도량형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보수로부터는 ‘친북용공’이란 딱지를, 급진적진보로부터는 ‘회색분자’라는 협공을 받곤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대부분의 지식인으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이다. 화려한 가문과 스펙에도 권력과 자본에 줄서지 않고 민족의 분단문제에 천착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으로 일관된 ‘가치 지향적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 달 22일 오후 7시 경북대 제3합동강의실. 200여석의 좌석이 빼곡히 차고 일부 청중은 강의실 복도에 앉아서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10대~80대까지의 연령대가 함께 모여 강의를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2013년 체제 만들기, 어떻게 가능 한가’를 주제를 가지고 2시간이 넘는 강의와 토론이 오갔다. 토론 및 질의응답이 끝난 뒤 대구의 한 호텔 방에서 밤 11시정도까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꼿꼿하게 좌정해 차분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와 존댓말로 응답을 했다.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합리적이고 온화한 외유내강의 기품이 흘러 넘쳤다.

◆백낙청= 1938년 대구 출생. 55년 경기고 졸업. 59년 미국 브라운대 수석 졸업. 72년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 63∼74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으로 서울대에서 징계·파면. 80∼2003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복직·정년퇴임. 66∼80년 ‘창작과 비평’ 편집인. 88년 계간 ‘창작과 비평’복간 후 현재까지 편집인. 현 서울대 명예교수, 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

주요 저서로 ‘분단체제변혁의 공부길’ ‘흔들리는 분단체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 다수.

-약력을 찾다보니 대구출신으로 돼 있다. 대구와는 어떤 인연인가.

“1938년 외가인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태어났다. 자라기는 당시 지방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자랐고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13살 때 6·25가 터졌다.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와서 17살 때까지 살았다.(그의 부친은 인제대학교의 모체가 된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의 동생 백붕제로, 변호사를 하다 형과 함께 납북됐다) 대구에선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복귀하기 전에 중앙로 송죽극장 앞에서 껌과 담배를 팔기도 했다. 그에 앞서 잠시지만 영남일보 가판신문 팔기를 하기도 했다.”(6·25전쟁당시 영남일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발행되는 신문이었다)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도 영남일보 가판을 돌렸다는데 아는 사이인가.

“김우중씨는 경기고 입학 동기인데 그가 한 해 유급해서 후배들과 졸업했다.”

-대구가 제2의 고향인가.

“대구에서 태어났고 외갓집이 있었고 또 청소년기 한때를 보냈으니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겠다. 외가는 일찍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대구에는 외가친척이 좀 있을 뿐인데 그중 이종사촌형님 한 분과는 가깝게 지내는 편이다.”

-그동안 남북의 분단문제에 대해 천착하면서 민족의 통일과 화합을 위해 학문으로, 행동으로 노력하셨다. 민족과 국가의 의미는 어떤 관계인가.

“민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민족이란 우리가 속해있는 여러 중요한 집단 중 하나다. 다만 우리민족의 경우 일본에 지배를 받다 해방됐고 원래 하나였던 민족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분단되었다. 분단국가에 절대적으로 충성을 집중하면 결국 같은 민족인 북한사람과 딴 나라 사람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살면서 분단국가니까 충성할 필요가 없다 해도 곤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민족과 국가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근’이란 어떤 병인가.

“분단국가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분단체제 속에 오래 살다보니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자들, 특히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분단된 걸 빼버리고 비분단국가에서 모범사례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걸 비꼰 것이다. 북이야 어떻게 되건 우리는 모를 일이고 남한에서 우리끼리 선진 복지국가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그런 예의 하나다.”

-올초 출간한 베스트셀러 ‘2013년 체제 만들기’에서 2013년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

“2013년은 새 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이자 남북이 정전협정을 맺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분단은 1945년에 시작했지만 분단체제는 53년부터 시작됐다. 휴전이후 한국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4·19와 5·16, 10월유신, 5·18민주항쟁, 6월항쟁 등은 모두 남한사회에 국한된 사건이었다. 민주화를 이룩한 87년 체제 또한 남녘에 국한된 성취였을 뿐 53년 분단체제의 틀을 바꾸지는 못했다. 물론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이 함께 6·15시대를 열었지만 이는 다분히 선언적 의미였다. 2013년을 계기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등 한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고‘1단계 통일’로 간주할 수 있는 남북연합을 실현해야 한다.”

-대부분 북한의 핵이 한반도 평화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북핵 폐기를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걸 남북접촉의 전제조건처럼 내걸다보니 비핵화는커녕 북의 핵능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핵을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도와준다고 하면 일이 안 풀린다. 북이 비핵화하려면 일단 대화하면서 체제보장과 경제적 이득을 보장해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 실은 평화협정체결과 북미수교 그리고 대규모 경제원조가 더해지더라도 북으로선 남쪽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재통합과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이란 장치를 마련해나갈 때 비로소 북측 정권으로서는 완전한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비록 100% 안심이 되지는 않더라도 자체개혁의 모험을 강행할 여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보수는 이를 사회주의식 통일방법이라고 비판한다. 남북연합과 김일성이 주창한 고려연방제는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민족끼리’통일은 가능한가.

“우리민족끼리 통일하자는 말은 6·15남북공동선언 1항에 나온다. 외세가 주도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는 선언적 의미인데 북이 이 구절만 딱 떼어내서 ‘우리끼리’를 하나의 이념으로 격상시켜 정치구호가 된 것이다. 남북연합과 고려연방제는 완전히 다른 거다. 남북연합은 민정당 정권인 노태우정부 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서 나온 구상이다. 즉 남북이 1민족·1연합·2체제·2정부를 유지하면서 남북 지역정부가 각각 내정·외교·군사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고려연방제는 연방정부가 외교·군사권을 행사하고 남북연합이라는 과도기 없이 즉각 연방제통일을 시행하자는 것으로 원래 적화통일방안이었다. 그래서 6·15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조차 냉전시대의 유물이며 불가능한 구상이라고 시인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통일방식이 바람직한가. 중국이 걸림돌이 아닌가.

“역사상 압박을 해서 무너진 공산정권은 없다. 베트남·예멘·독일 통일의 어느 경우와도 달리 분단에서 통일국가로 한꺼번에 이행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중간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본다. 당국과 기업의 역할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이 적극 참여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중국은 북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확고한 방침이 있다. 안 무너지게 받쳐줄 힘도 있다. 6·25전쟁 때 미군도 많이 죽었지만 중공군은 그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이 외국에서 전쟁을 치르다 이렇게 많이 죽은 사례는 없다. 하지만 중국에 위협적이지 않게 통일하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강력한 한민족통일국가는 중국도 일본도 바라지 않는다. 남북이 연합해서 느슨하게 연합하겠다고 하면 중국이 반대 못한다.”

-김정은 체제가 오래 갈 것으로 보나.

“같은 유일체제라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력이 달랐듯 김정은체제도 많든 적든 변용을 거쳐 형성되리라 본다. 김정일 위원장이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고는 하지만 그는 수령도 주석도 아닌 ‘선군정치’라는 군부와의 일정한 타협을 전제로 권력을 행사했다. 마찬가지로 김정은이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옹립되더라도 그의 통치는 당과 군, 엘리트집단 간의 또 다른 관계 속에 진행될 것이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현실에 적합하며 ‘대장동지’로서 김정은이 얼마만큼의 정치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김정은 정권의 명운이 갈릴 것으로 본다.”

-대북지원과 ‘퍼주기’논란은 어떻게 보나.

“대북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의 구체적 내용을 두고 그 효율성이나 투명성을 엄정하게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상적인 무역거래대금까지 지원금에 포함시킨 건 아닌지, 또 지원금 자체가 ‘퍼주기’라고 부를 만큼 넉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게다가 금강산사업이나 개성공단을 시작하면서 북측 군사요충지 너머로 휴전선을 실질적으로 후퇴시키는 등 ‘퍼오기’를 해온 점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한국이 ‘햇볕’이 아닌 ‘찬바람’정책을 취했더라면 북이 붕괴됐으리라는 주장이 남한의 실력을 턱없이 과장한 억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지난 4년간 우리가 ‘해봐서 알지’않나.”

-페이스북 친구가 많던데 트위터는 하지 않나. SNS시대를 어떻게 보나.

“페이스북 친구가 많은 편이다. 바빠서 자주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가능하면 회답도 한다. 나이도 먹고 하는 일이 바쁘지만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게 의미가 있더라. 트위터는 생활이 너무 번잡해질 것 같아 하지 않는다.(웃음) 팔로어가 많은 것보다 어느 정도 친밀감을 갖는 인연을 맺는 것이 좋다.”

-대구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대구·경북은 대통령을 4명이나 배출시킨 지역이다. 출세한 대구·경북사람들은 주로 서울 강남에 가서 살고 그들이 대구와 대구시민을 위해서는 진정 무엇을 해주었는가. 대구가 정치적으로 보수라고 하지만 원래는 진보의 아성이었다. 그렇다고 진보 일변도로 가라는 건 아니다. 1당 일색이어선 국가도, 도시도 발전이 없다. 경쟁이 있어야 한다.”

(영남일보 201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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