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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아카시아를 보며 -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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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0 11:36 조회30,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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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를 망친다는 저주 속에
너희는 땅속을 숨어다니며
바위를 바수고 무덤을 뚫는다
속임수와 으름장으로 땅 위에 자란
크고 굵은 나무 튼튼한 뿌리들을
칭칭 감아 목 조여 죽이고
독버섯 따위 자잘한 뿌리들은 아예
아삭아삭 통째로 씹어 삼킨다
주먹질 발길질 속에서도 언젠가
땅속은 마침내 너희 천지가 되고
산과 들에 휘황하게 피어나서
하늘과 땅을 어지럽히던 꽃들은
추하게 죽어 그림자로 쓰러지리라
그 속에 휩싸여 함께 쓰러질까
두려워 떠는 우리들을 비웃으며
다시 순한 나무가 되는 너희를 누가
제 몸의 가시로 남을 찌르며
산을 온통 파먹고 결딴내는
이 시대의 아카시아라 윽박는가

 

우리는 온갖 종류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나 민족, 특정 직업, 어느 지역 사람,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편견도 있어요. 조금 있으면 희고 달콤한 아카시아 꽃이 피겠지요. 많은 이들이 이 나무를 싫어합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음모로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이 땅에 심겨졌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심겨졌든 아카시아는 순한 나무. 시인의 시를 읽으니 갑자기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최근 벌어진 흉흉한 사건의 범죄자가 조선족 이주노동자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분은 없겠지요? 사르트르는 위대한 시인 발레리는 쁘띠 부르주아지만 모든 쁘띠 부르주아가 발레리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청년은 분명 한국인이지만 우리는 그 청년이 아닙니다.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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