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나이 먹은 집과 뉴타운 > 회원칼럼·언론보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회원로그인

회원칼럼·언론보도

[이필렬] 나이 먹은 집과 뉴타운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5-11 14:14 조회23,088회 댓글0건

본문

얼마 전 차를 타고 서울의 구파발을 지나갔다. 내게 남아 있는 그곳의 기억은 아담한 주택들이 가지런하면서도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며 서 있던 한양주택 단지다. 비슷한 규모의 단층 주택 수백채가 한곳에 모여있던 이곳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촌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다른 집단 주거단지와 마찬가지로 한양주택 단지도 정부의 계획에 의해 조성됐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북한대표단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낡고 허름한 집들을 철거하고 주황색이나 청색 기와를 얹은 집들을 지어 남한이 잘산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출발은 석연치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양주택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마을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 파릇했던 집들은 30여년 동안 연륜이 깃들여 친근하고 정감 가는 모습을 갖게 되었고, 집주인들이 각각 가꾼 마당과 담장은 미리 조율이나 한 것처럼 서로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지 1996년에는 서울시 최초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한양주택 단지가 2000년대 중엽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할 때 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되었다. 주민 상당수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꽤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냥 저항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방안까지도 모색했다. 주민들은 단지를 에너지 자립 마을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보였고, 나는 마을의 에너지 전환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국수를 먹으며 몇몇 주민과 그렇게 해보자는 이야기까지 나누었지만, 그들은 서울시의 회유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정든 집과 마을을 포기하고 떠나갔다.


한양주택 단지가 아파트촌으로 바뀌는 과정은 우리 또는 당시의 서울시장이 세월의 무게가 지닌 의미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역사는 옛것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하고 진열한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의미있는 것이 되고 삶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세월의 흐름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조금 낡은 것은 부수고 새것으로 대체하는 데 익숙해진 시장과 대다수 시민들은 그런 생각을 할 능력이 없었다. 땅에 엎드려 있는 단층 주택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30층짜리 아파트들로 그곳을 훤하게 만들고 돈도 벌자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불과 5~6년이 지난 지금 사정은 180도 변했다. 뉴타운은 애물단지가 되었고, 마당이 딸린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 근교에는 여기저기 전원주택풍의 새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집들이 한양주택 단지 같은 연륜을 갖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집의 외형이 친근하지 않고 세월의 때가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옥이나 붉은 벽돌집은 나이를 먹으면 고풍스러워진다. 나무의 색이 조금씩 짙어지고 벽돌의 붉은색도 점차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 근교의 새집들은 변색이 되지 않는 모조목재로 치장하거나 나무에는 변색 방지 칠을 한다. 새것 상태로 오래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낡은 집들을 부수고 새 아파트로 멋지게 단장한다는 뉴타운 계획의 생각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자락에는 나무집들이 많다. 거의 모두 칠을 하지 않았다. 집을 보면 금방 나이를 알 수 있는데, 새집이나 나이먹은 집 모두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런 집들이 함께 있으니 마을이라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든다. 제대로 된 마을에서는 아이들뿐 아니라 오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온 노인을 볼 수 있다. 집들도 마찬가지다. 조금도 때묻지 않은 집뿐만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집들이 있어야 마을다운 마을이 형성된다. 그러니 한양주택을 없애고 만든 뉴타운은 마을로 진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2. 5. 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Segyo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EL. 02-3143-2902 FAX. 02-3143-2903 E-Mail. segyo@segyo.org
04004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12길 7 (서교동 475-34) 창비서교빌딩 2층 (사)세교연구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