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서경식의 질문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0 11:39 조회33,67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낯선 목소리의 등장 | ||||
방송작가인 고 박이엽(朴以燁) 선생의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서경식(徐京植)의『나의 서양미술 순례』(창작과비평사 1992, 개정판 창비 2002)가 출판된 지 꼭 20년이 된다. 처음 책이 서점에 나왔을 때 다수 독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실은 그 책의 내용보다 저자가 유명한 서승·서준식 형제의 아우라는 점이었다. 그 형제들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대표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재일동포 2세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국에 유학을 왔다가 1971년 대통령선거 일주일 전에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20년 가까이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형들을 군사정권의 손아귀에 빼앗긴 채, 아들들의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의 잇단 별세로 더욱 암담한 기분이 된 서경식은 훌쩍 유럽으로 떠난다. 후일 그는 자신의 첫 저서가 탄생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렇게 쓰여진 ‘무명의 재일조선인’ 원고가 우연히 어느 저명한 정치평론가의 소개로 출판에 부쳐지고, 이듬해에는 다른 한 눈 밝은 한국인 번역자에게 발견되어 한국어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집필부터 출판·번역까지의 전 과정에서 볼 때 김윤수(金潤洙) 교수의 지적대로 “통상적인 의미의 미술기행 - 느긋하고 한가롭게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감상한다거나 전문적인 시각으로 작품해설을 늘어놓은 책”이 아니다. 그러나 미술전문가의 저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은 전문가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우울한 방랑객의 시선 때문에 이 책에서 맛보게 되는 작품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자세와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리한 감수성은 좁은 의미의 전문성을 압도하는 매력으로서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제 서경식은 형들의 아우가 아닌 그 자신의 고유명사로써 이 땅의 문화계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저자가 지적 발언자로서 사회적 무게를 획득해가는 과정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관계하는 것 같다. 서경식의 책이 처음 출간된 1992년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중대한 전환기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시아의 많은 군사독재정권들이 물러났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탈형태가 세계를 장악했다. 한국에서는 해금 이후 수많은 이념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통일운동의 열기가 지축을 흔드는 듯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서경식 미술기행의 섬세한 문체는 당대발복(當代發福)을 갈구하는 독서대중의 조급한 마음에 미지근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유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에 끊임없이 호소하면서 그것과의 교감을 잃지 않는 것임에도 당대의 지배적인 이념적 구획에는 잘 포섭되지 않는 미묘하고 독특한 ‘미학’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김대중 정부가 마감될 무렵에야 그의 두 번째 저서『청춘의 사신(死神)』(김석희 옮김, 창비 2002)이 출간된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10년째 그 나름의 서경식 붐이 이어지고 있다. 내 책상 위에 꺼내놓은 그의 책들만 하더라도, 앞에서 거명한 것 말고도,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할 수 있다.
| ||||
서경식이 자신에게 물었던 것 | ||||
서경식에게 문제의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었다. 마치 입양사실을 모르고 자라던 아이가 우연히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자기 인생의 뿌리에 대한 의혹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회의 다수자가 누리는 존재의 자명성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수시로 경험한다. 가령, 소년시절의 독서편력과 성장담을 기록한 책『소년의 눈물』(p.111~4)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나온다. 어머니와 함께 중학교 면접시험에 간 나는 전교생 중에 “재일조선인 학생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어느 날 학교로 가는 전차 안에서 일터로 향하는 할머니들이 조선말로 이야기하는 장면과 마주치는데,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할머니들에게 쏠리고 ‘나’는 아는 할머니가 말을 걸어올까봐 가슴을 졸이며 뒷자리로 피해간다. 영어수업 시간에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우고 앞자리 학생부터 선생님 입모양을 흉내내며 발음연습을 하는데, 차례가 가까워올수록 ‘나’는 긴장이 고조되어 입을 열지 못한다. 선생님의 거듭된 독촉에 겨우 “하지만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은 이 모든 쓰라린 경험들이 가시가 되고 몽둥이가 되어 그를 혹독하게 의식화시켰고, 그런 경험의 누적은 그로 하여금 다수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도록 내몰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견지하고자 하는 지적 독립성의 원천은 다름 아닌 그의 사회적 소외였다.
이처럼 독단과 독선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자유의 정신으로 서경식은 어떤 주제의 글을 쓰든 그것을 자기 집안의 고난의 내력에 관련지어 반추하고 재일조선인의 수난의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그 의미를 추궁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자의 또는 타의로 일본에 건너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지만, 그의 시야는 거기 머물지 않고 중국의 동북지방(만주)과 소련의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 문제에까지 확장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저서(『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p.24~33)를 통해, 1910년에 대만과 조선이 일본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법지역(異法地域)으로 규정되었다는 것, 그 결과 대만인과 조선인은 헌법적 권리의 박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1922년 조선호적령의 실시로 조선인의 일본 전적(轉籍)이 금지되고 이로써 조선인·일본인의 혈통적 구별이 제도화되었다는 것, 그래서 형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일본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 우편으로 충청도 논산에 신고를 해야 됐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패전 후인 1947년 외국인등록령이라는 법이 만들어져 등록이 강제될 때 재일조선인들이 국적을 ‘조선’으로 신고한 것은 당시에는 아직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생기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1965년 한일협정의 체결로 인해 신분상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꾸는 소동을 또 한 번 치르게 되었다는 것도 절대다수의 한국인은 거의 모르고 지내는 사실이다. | ||||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서 | ||||
그러나 서경식은 자신의 국적이 ‘한국’임을 거듭 확인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재일‘조선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때의 ‘조선’은 결코 어떤 정치적 의미의 국가개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소련으로 또 일본으로 이산(離散)하기 이전의, 또 해방 후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하기 이전의 하나였던 민족을 가리키는 기호라고 그는 말한다. 일본‘국가’의 법적 배제와 사회적 차별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온 서경식으로서는 ‘국어’ ‘국민’ 같은, 국가주의적 귀속을 표상하는 개념들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북간도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그에게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가장 비극적으로, 어쩌면 가장 순결하게 구현된 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둘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음도 서경식은 놓치지 않는다. 윤동주는 한반도 바깥에서 태어났음에도 모어가 조선어였고 그 모어의 공식적 사용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남몰래 모어시(母語詩)를 썼으며 바로 그런 비밀스런 모어사랑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을지 몰랐다. 반면에 서경식의 경우 모어의 탈환에 필사적으로 나섰던 형들은 모국에게서 가혹한 처벌로 보답 받았고 그 자신은 일본어를 통해 형성된 아이덴티티의 모순을 끝내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는 수상식 인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언어의 감옥에서』, p.61) 서경식이 되풀이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수인적 지하생활로부터의 절망적인 탈출시도였다. 인간영혼의 꿈의 결정체이자 비상(飛翔)의 흔적인 동서고금의 위대한 예술작품들 속에서 그는 인류가 겪은 시련과 고통의 미학적 결과물들이 자신과 같은 외로운 유랑자의 피폐한 영혼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느꼈고, 거기서 승화된 아름다움과 좌절의 아픔을 보았다. 그에게 예술은 차별과 모욕, 강제와 박해의 공동운명에 짓눌리며 힘겹게 살아간 사람들 또는 그것에 저항하다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이 남긴 봉인된 증언이었다. 그러므로 봉인을 뜯어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풀어내는 것을 서경식은 문필가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쁘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을 꼼꼼하게 추적한 끝에 적어놓은 다음 문장이 그 비관주의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읽어본 한에서 기록자의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문학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높은 성취에 이른 작품은『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이다. 방금 나는 ‘작품’이라는 말을 썼는데, 서경식의 다른 저서들이 ‘기행문’ ‘에세이집’ ‘강의록’ 따위로 분류될 수 있는 데 비해 이 텍스트는 ① 레비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행, ② 서경식 자신의 어두운 개인사, ③ 나치 집단수용소에서의 레비, ④ 레비의 귀향과 자살 등 크게 네 겹의 스토리를 정교한 ‘중층적 서사구조’(이 용어는 서경식이 레비의 어느 작품에 대해 사용한 분석개념이다) 안에 얽어 넣음으로써 수준 높은 문학에 도달하고 있다. “1996년 1월 1일, 나는 밀라노에서 또리노로 향하는 보통열차 안에 있었다.”는 첫 문장에서 시작하여 “내일은 또리노를 떠나는 날이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기까지의 액자소설적 구성은 액자 안에 담긴 것이 끔찍한 인간파괴의 참상임에도 그것을 아련한 여수(旅愁)의 정서로 감싸고 있다. | ||||
민족문학과 한국문학 | ||||
어느 책에서나 서경식의 문장은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가득차 있어 독자를 의자에 편안히 앉아있게 하지 않는다. 세계를 가득 채운 모순과 불의에 대항해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글이 우리에게 불편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점에서 나는 그의 글 대부분에 깊이 공감한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최신의 저서『디아스포라의 눈』은 대지진과 원전사고 이후의 일본사회를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어서 큐우슈우(九州)지방을 잠깐 구경한 것 이외에 일본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공부되는 바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의 한 장은 나의 직분과 직접 관련된 것이어서 그에 대한 답변삼아 짧게나마 내 생각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12월 지난날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꾼 것은 언론보도로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상당 기간의 내부적 토론과 적잖은 진통을 거친 끝에 회원들의 투표로 그렇게 결정되었는데, 서경식의 글「한국문학의 좁은 틀을 넘어서」는 바로 그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의 주장과 의문은 다음의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일찍이 1996년 ‘문학의 해’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李恢成)이 제기한 바 있었고, 나는 이에 대한 견해를 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었다.(염무웅,『문학과 시대현실』, p.572~8) 이회성과 서경식의 주장의 차이점은 전자가 일본어로 쓰여진 자신의 작품이 ‘범민족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비해 후자는 ‘한국문학’이 한반도 남쪽에 국한된 협소한 개념으로서 대한민국 이전 및 대한민국 바깥의 문학을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작가회의의 명칭에서 ‘민족문학’이 떨어져나간 것이 심히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서경식의 주장에도 동조하기 어렵다. 간단히 말하면 ‘대한민국’은 한반도 남쪽에 실존하는 국가의 공식명칭이지만, ‘한국’은 한편으로 그 대한민국의 약칭으로 통용되면서도 다른 한편 국가기구의 작동범위를 넘어서 그것과 무관하게 때로는 그것에 저항하면서 삶을 꾸려가는 일정한 인간공동체를 가리키는 기표인 것이다. 나로 말하면 일제강점기 말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우리 세대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한국’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토적 범주 이상의 좀 더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입력되어 있다. 그러니까 양복·양식·양옥에 대비된 한복·한식·한옥의 ‘한’(韓)은 1948년 이전뿐만 아니라 1910년 이전의 ‘조선’에도 맞먹을 만한 어떤 항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요컨대 ‘민족문학’ ‘한국문학’ ‘조선문학’은 단순히 이론적 분별의 문제라기보다 19세기 중엽 이후 오늘까지 진행된 민족의 이산(離散)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개념상에서 반영한 자기분열의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한국’의 국가주의화가 가져올 퇴행과 위험을 경계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조선’의 과도한 민족주의화에 따르는 시대착오적 배타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긍정적인가? 그렇다. 그건 분명 긍정적이다”(『디아스포라의 눈』, p.113)라는 서경식 같은 소수자의 목소리는 언젠가 도래할 평등하고 평화로운 다민족·다언어·다문화 사회의 형성을 위해 불가결한 주춧돌 노릇을 할 것이다. 그때 그 사회에 붙일 이름이 ‘한국’이든 ‘조선’이든 지금부터 골치 썩일 필요가 무엇인가. |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 <이달의 책>. 2012. 4. 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