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곽효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4 16:37 조회31,68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자욱한 엉성한 진열품 너머 회벽에 걸린 낡은 흑판
동네 사람들 살림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로 쓴 외상 장부
곽병호……
곽효환/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목장갑 네 켤레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운
깨알 같은 글씨 가득한 한 뼘들이 전화번호부에도 인명록에도
꼭 하나뿐이던 내 이름.
수십 가구 작은 마을에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으로 존재하네
그것이 허세 없는 내 이름값이려니
어린 시절 골목어귀 구멍가게의 회색노트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진은영이네/소주2, 두부1모. 할머니가 심부름은 항상 제게 시키셨거든요. 외상장부에 적힌 이름은 그 집 장남이나 장녀 아이의 이름. 아니면 고등학교에서 늦게 귀가하는 형님·누나들 말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막내의 이름. 어른이 되어서는 외상을 해 본 적이 없네요. 아니 매일 하는군요. 오늘도 신용카드를 그었으니. 가게 아주머니는 "얘야, 느그네 외상값 만 500원이여, 소주 외상은 더는 안 된다고 혀" 하시면서도 두부니 국수니 급한 건 외상으로 선뜻 주셨는데. 이런 고마운 잔소리에 파산할 걱정은 없었는데. 요즘 외상장부는 잔소리도 별로 없다가 이자까지 무섭게 챙겨서, 고통 받는 신용불량자가 벌써 100만이라네요.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4. 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