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지식은 이재민의 처지 가운데에서 회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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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30 13:55 조회29,9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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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야스쿠니나 역사인식 문제를 철학자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파헤쳐온 다카하시 데츠야(高橋哲哉) 도쿄대 교수가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관련하여 한권의 책을 내셨다.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오키나와(犠牲のシステム 福島・沖縄)(集英社, 2012)란 책으로 1945년 패전 후 일본의 발걸음과 원전 사태의 내적 연관성을 다룬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사과정 시절 지도 교수를 맡아주셨던 관계로 연구 주제나 방법뿐만 아니라 학문하는 자세와 태도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분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손에 들고 한숨에 다 읽은 후에 집필에 전념하셨을 그 시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고 한탄스러운 마음이셨을지 짐작이 갔다. 근대 국민국가 일본이 희생의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음을 야스쿠니 문제 등을 통해 오래 전부터 비판해왔지만, 그 시스템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토착화되었는지를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마주하기 전까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선생의 고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인해 선생의 그간의 작업이 얼마나 한계를 가진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카하시 선생의 고통과 한탄은 물론 후쿠시마 출신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한 층 더 아프고 깊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카하시 선생을 포함하여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고향이나 자연 파괴에 대한 연민과 분노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오랜 시간 전개해온 비판이 이렇게나 무력했던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원전사태로 인한 피해를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한 도쿄전력과 이른바 ‘원전족’이라 불리는 정치가들, 그리고 이들을 국가 시스템 차원에서 보조하는 관료들에 대한 비판이 무력하고 모자라다는 자기반성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1945년 패전 이후 전개해온 근대 일본 비판이 근본적이고 발본적인 국가 비판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다.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지 못했고, 전쟁을 주도한 정치가와 관료가 고스란히 전후 복구를 위한 테크노크라트로 등용되었으며, 파시즘과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정신사적 비판 대신에 문화, 도의, 평화를 대동아공영권 대신 국체의 슬로건으로 내세운 지식인들의 무책임함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계기로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즉 패전 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렇게 잘못 꾀어진 단추를 단 하나도 바로 잡을 수 없었고, 그 무능함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무감해져 갔다는 자괴감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계기로 지성계를 사로잡고 있는 셈이다.
다카하시 선생의 희생의 시스템은 그런 자괴감과 자기반성이 만들어낸 역작이다. 이 책이 역작인 까닭은 심오한 철학적 성찰이 담겨져 있다거나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한 치밀한 역사의 재구성을 이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단순명쾌한 논리로 누구나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희생’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해석한 ‘가벼운’ 책이다(물론 오해는 금물이다. 물리적으로 가벼운 것이지 이 책에서 전개되는 논지와 성찰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역작인 까닭은 바로 다카하시 선생의 태도 표명에 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서 후쿠시마와 오키나와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하려는 의도는 없다. ‘희생의 시스템’ 개념을 원리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이 책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단지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에 대한 약간의 고찰을 통해 전후 일본 국가에서의 희생의 시스템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런 희생을 회피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출발점으로 삼자고 생각할 뿐이다.”
얼핏 보기에는 매우 소극적인 집필 의도이다. 그렇지만 이는 매우 강인한 정신의 표명이다. 이미 말했듯이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전후의 비판적 지성이 얼마나 무능했고 태만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태와 마주하여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스스로의 작업을 회의하고 비판과 성찰을 인간 문명 전체 차원으로 추상화함으로써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하시 선생은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의 길을 부정하고 회의하기 보다는 담담하게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쟁, 식민지, 역사의식, 야스쿠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희생의 시스템’을 다루었다면, 이제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에서 희생을 강요당한 오키나와와 후쿠시마를 대상으로 하여 기존의 논의를 이어나가겠다는 태도 표명인 셈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작업이 옳다는 고집스런 자기 확신이나 아집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비판 작업이 회의의 대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그럼에도 비판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고고한 자세라기보다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산산 조각난 파편들을 모아 다시 시작하려는 이재민의 처지와 닮아 있다. 선생의 책이 후쿠시마 사태를 기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망가진 도구들을 추슬러보려는 회복의 몸부림에 가까운 까닭이다.
아마도 패전 후 일본의 비판적 지성은 이런 이재민의 처지와 회복의 몸부림을 망각한 데서 작업을 전개해왔던 것 같다. 이미 말했듯이 대동아공영권을 문화-도의-평화국가라는 슬로건으로 바꿔치기 하고, 군통수권자인 천황을 평화의 상징으로 날조했으며, 시스템은 고스란히 잔존시킨 채 그 이름만을 바꾼 패전 후 일본의 발걸음은 결코 이재민의 처지와 회복의 몸부림을 알지 못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마주하여 ‘힘내라 일본(がんばれ日本)!’ 따위의 구호가 난무하는 것도 이런 망각의 징후일 터이고 말이다. 비판적 지식의 본령이 인간, 사회, 세계에 대한 비판과 성찰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본령은 지식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데에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이지, 지식은 그대로 놓고 비판과 성찰 대상을 끼워맞추는 것으로 지켜낼 수 없다. 원전 사태를 인간 문명의 오만함이나 국가 시스템의 관료화 등으로 치환하여 비판하는 일은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문제는 지식이 과연 이재민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재민 자체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회복을 독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회복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카하시 선생을 비롯한 몇몇 지식인들의 몸부림이 안타까우면서도 소중한 까닭이다. 부디 이 땅의 지식도 한국의 상황을 높은 곳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붕괴를 회복하는 몸부림을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서남통신. 201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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