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정전 사태,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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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07 14:13 조회25,1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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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이 안 돼 있다. 기본을 지켜라.” 정전 사태 후 대통령이 전력 수급을 책임진 사람들 앞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그가 이 말로써 전달하려 한 의미는 ‘대비를 하지 않았다’였던 것 같다. 옳은 말 같지만, 그가 담당자들을 질책하며 발언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기본’의 근원까지 내려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기본’이란 기온이 얼마나 올라갈지 기상청에 문의하고, 발전소를 즉시 전력 공급할 수 있는 상태로 대기시키고, 수리·점검은 시차를 두고 하며, 단전에 들어가기 전에 국민에게 미리 알리고, 전기가 없어서는 안 될 곳은 단전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등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이 정도의 ‘기본’만 지켰으면 정전 사태는 오지 않았거나, 정전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결과만 심각했지 원인은 별것 아니다. 주된 원인은 ‘기본’을 갖추지 못한 담당자들의 불성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 고치면 앞으로 정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대통령의 생각이고, 그렇기에 그는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기본 안 돼 있다”라고 격노한 대통령도 기본 못 갖춰
이번 사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그 정도라면 ‘기본’은 이명박 대통령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재발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접근은 근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전력공급망은 거대한 네트워크이다. 그곳에서 생산되어 흘러가는 전기는 변동성이 대단히 강하다. 어떤 때는 아주 많은 전기가 흘러가야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의 절반도 안 되는 전기가 흘러간다. 이것을 모두 감당해야만 전력 네트워크가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된다.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세심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의 전력 네트워크도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 전기의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은 24시간 관리를 통해 실시간으로 맞추어진다. 대규모 정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난 수십년간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 수시간에서 수일에 걸친 대규모 정전 사고가 있었다. 우리의 네트워크 관리가 미국보다 훨씬 더 잘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 일도 없다가 갑자기 사고가 터졌다면, 원인은 사소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곳에 있으리라고 봐야 한다.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전기 소비가 전력 네트워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했다는 데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08년 한국의 일인당 전기 소비는 8944㎾h로 일본의 8432㎾h, 독일의 7201㎾h, 프랑스의 7835㎾h보다 높았다. 2030년이 되면 1만3500㎾h가 되어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다.
또 하나 주요 원인은 정부의 전기요금 관리 덕분에 전력 네트워크가 서서히 망가져왔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매년 조 단위의 적자가 나는 한국전력에서 안정적인 전력 수급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전력시장에 경쟁을 도입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전력의 발전사업부를 자회사 여섯 개로 쪼개어서 서로 경쟁시키고 있다. 적자 구조에서의 경쟁은 무리수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예열도 해놓지 않은 발전소를 예비력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한 번도 정전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연료만 낭비하고 적자를 증가시키는 예열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번 일로 존재가 드러난 전력거래소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부호가 찍혀야 한다. 전력계통 운영과 급전이라는 전력거래소의 주 임무는 본래 한국전력 소관이었다. 전력 판매를 한국전력에서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독점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니 전력거래소에서 하는 일은 아마 한국전력에서 더 잘할지 모른다. 만일 한전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둘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을 터인데, 이런 사정도 이번 정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의 격노 뒤 책임자를 찾으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러나 책임자는 없다. 굳이 찾는다면, 독점과 가장된 경쟁이 병존하는 우리의 전력 수급 구조와 전기를 너무 많이 쓰는 우리 모두일 것이다.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시사IN. 201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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