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개도국 ‘토지수탈’ 한국에 티라나선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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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2-09 12:06 조회21,66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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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라나선언 : 빈곤층 토지 접근성 보장 인권원칙
최근 인터넷에서 티라나선언이 국내에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를 찾아보다 크게 놀랐다. 이 선언을 다룬 한글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고 재확인했지만 뉴스 사이트는 물론 블로그나 카페에도 일절 나와 있지 않았다. 티라나선언은 올해 5월 알바니아의 티라나에서 국제토지연합(ILC)이 주도해서 제정한 인권원칙이다. 정식명칭은 ‘극심한 자연자원의 경쟁시기에 빈곤층의 토지 접근성 보장을 위한 티라나선언’이며, 세계은행을 비롯한 많은 국제단체들이 합의한 문헌이다. 요즘 인권운동에서 재발견되는 핵심 권리인 식량권이 얼마나 절박한 문제인지를 시사해 주는 움직임이다. 이렇게 중요한 동향을 다룬 한글 기사나 자료가 단 1점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넘쳐나는 국제 개발 담론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아프리카와 아시아 저개발국의 토지를 구입하거나 장기임대하는 관행은 기후변화에 따른 농산물 공급 불안정과 가격앙등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해외 땅사기 추세가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한 2008년을 기점으로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2001년 이래 외국으로 넘어간 개발도상국들의 땅은 모두 8000만 헥타르, 남한의 8배 면적이다. 아프리카에선 에티오피아, 가나, 마다가스카르, 말리, 수단 등이 주요 공급지이고, 아시아에선 인도네시아의 땅이 많이 팔리고 있다. 어떤 나라가 외국 땅을 사들일까? 대한민국이 앞장서고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이 큰손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땅을 사는 경우도 있고, 곡물 메이저들이 농업개발의 형태로 사들이기도 한다. 앞으로 식량이 결정적인 자원이자 돈벌이 수단이 될 것을 눈치 챈 한국의 종합상사들도 국외 곡물자원 확보전에 이미 깊게 발을 들여놓았다. 중앙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초국적 투기자본이 곡물시장으로 대거 유입된 것도 이런 경향을 부채질한다.
돈 많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의 자본이 해외에 농지를 구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논리가 있다. 농업기술 이전과 협력을 통해 개도국의 발전을 돕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농업생산력을 높여 현지주민들과 투자회사들이 모두 이득을 보는 윈윈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농업투자가 순기능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해외토지 구입이 본격화된 지난 몇 년간 우려의 소리가 점점 커지는 실정이다. 저개발국 농지 구입에서 널리 유포된 황당한 신화가 있다. 아프리카 저 어딘가에 개발을 기다리는 광활한 황무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처녀지가 꿈같이 펼쳐져 있을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옥스팸이 펴낸 <토지와 권력>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이런 식의 환상이 서류상의 통계자료나 인공위성의 사진 이미지에 의해 굳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천만의 말씀이다. 오늘날 70억 인구의 지구상에서 전인미답의 옥토를 찾는 일은 화성에서 물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최근 미국 텍사스의 한 농업투자회사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60만 헥타르의 땅을 49년 계약으로 2만5000달러에 구입했다. 18억평의 땅을 단돈 3000만원에 산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은 황무지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9만명 이상의 원주민이 그 땅에서 나오는 소출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소유권이 없다 뿐이지 대대손손 그 땅에서 산 사람들이었다. 만일 외국계 회사가 들어와 대규모 산업형 영농을 시작하면 주민들은 자기 땅에서 농업노동자로 전락하며, 그나마 고용효과는 극히 미미하다고 한다. 국제 엔지오의 개입으로 그 계약은 무산되었지만 이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오늘날 해외자본의 개도국 토지 구입 열풍을 19세기 서구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에 빗대어 ‘토지수탈’(land grabs)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간다. 신식민주의적 행태라는 격렬한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한국 농림수산식품부가 올 4월에 펴낸 ‘해외 곡물자원 개발·확보 전략’이라는 브리핑 자료를 보면, 저개발국 농업투자를 토지수탈로 보는 여론이 존재한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시대에 자기 나라 땅의 소유·통제권을 상실하는 것 이상으로 국민감정을 건드리는 사안도 없을 것이다. 해외 땅 구입은 장기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국제 정치 이슈다. 2009년 마다가스카르에서 한국계 기업인 대우가 130만 헥타르 이상의 땅을 사려다 국민감정이 폭발하여 대통령이 하야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기근에 찌들어 신음중인 국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에 외부 기업이 들어가 농사를 잘 지어본들 추수한 농산물을 해외로 쉽사리 반출할 수 있겠는가? 세계적인 환경전문가인 레스터 브라운은 이런 상황을 묵시록적으로 묘사한다. “굶주린 사람들로 둘러싸인 추수 직전의 황금들판은 불 질러 태워버리기에 안성맞춤인 무대이다.” 그러니 21세기가 식량안보를 둘러싼 지정학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하는 브라운의 경고는 우리에게 비수처럼 와 닿아야 마땅하다.
국내 농업을 죽이고 전 지구적 비교우위와 경쟁논리로써 이 난관을 돌파한다? 에프티에이(FTA)가 바로 이런 인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 식량인권의 관점에서 보나 인류 공동선의 관점에서 보나 수익성 논리로만 미래에 대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한겨레>의 탐사보도 특집에서 한국 기업의 국외곡물 자원 확보 현황을 취재해 보면 좋겠다. 단, 진출 기업의 안내를 받지 말고 현지주민의 말을 직접 들어보라. 그리고 우리의 식량 확보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되짚어봤으면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
(한겨레. 201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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