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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후쿠시마와 인문학의 존재 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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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30 14:17 조회21,1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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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1일부터 15일까지 도쿄 대학 “공생을 위한 국제 철학 교육 연구 센터(UTCP: University of Tokyo Center for Philosophy)”에서 개최한 국제 콜로키움에 참석했다. 프랑스, 독일, 폴란드, 미국, 중국에서 온 여러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기존의 학술회의와 달리 발표자들이 발표문 없이 주제에 관해 문제제기하고 테이블을 둘러싼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질문이나 코멘트를 다는 형식이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형식의 회의라 다소 당혹스러운 감도 있었지만 금새 적응되어 아주 알찬 토론을 즐기고 돌아왔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한국의 학술회의 관행을 이제 뜯어 고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보통 국내 학술회의에서는 완성된 논문 분량의 발표문을 자료집으로 엮고, 발표자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발표문을 요약해서 읽어내려 간다. 그러다보니 발표 시간 내에 발표자와 청중 사이에는 생동감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발표자의 발언을 일정 시간 들어야 하기에 애초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공부의 기본이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 할 때 학술회의는 연구 활동의 기초적 커뮤니케이션 장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의 학술회의에서 청중이 발표자의 말을 듣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면 발표자가 발언을 할 때 청중은 대부분 자료집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표자의 말은 허공을 맴돌고 청중은 청중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 남의 말을 열심히 듣고 그 일회적 때와 장소에서 자신의 말과 생각을 주조할 기회는 한국의 학술회의에서 제공되지 않는다. 단상에는 자기 글을 읽는 사람이, 객석에는 남의 목소리를 귓등으로 넘긴 채 남의 글을 읽는 사람만이 서로 분리되어 소외를 경험할 뿐이다. 연구 활동에는 분명 홀로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책이나 글과 씨름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살아 있는 장에서 일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목소리를 붙잡아 오감으로 남의 말에 반응하는 일이야말로 학문 공동체의 요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한국의 여러 연구자들은 학술회의의 장에서조차 글과 씨름한다. 논리와 형식을 갖춘 말뭉치 외에는 공식적 학술 담론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늘 딱딱하고 무겁기만 하여 모두가 모인 공간이 어때야 하는지에는 소홀했던 국내 학술회의의 관행은 연구 활동의 생동감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이렇듯 위축시켜온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도쿄대 콜로키움을 기획한 고바야시 야스오 교수와 나눈 대화를 새삼 곱씹어 봤다(개인적으로 고바야시 교수는 박사과정 시절의 은사이시고 논문 심사 과정에서 비판적이지만 우애로 가득 찬 논평을 해주신 선생님이시다.). 왜 이런 유연한 형식의 콜로키움을 기획하게 됐는가를 물어봤을 때 고바야시 교수가 뜻밖의 대답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해 3월의 도호쿠 대지진과 뒤이어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이런 형식의 회의를 기획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UTCP라는 조직은 10년 동안 대규모 학술회의 보다는 소규모의 농도 짙은 회의를 개최해왔고, 그 과정에서 쌓인 우애와 신뢰의 국제 네트워크가 유연한 형식이라도 괜찮다는 자신감의 원천이었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 자신감만으로 10년 사업을 매듭짓는 국제 학술회의를 파격적 형식으로 개최할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하며, 지진과 원전사태가 인문사회과학에 던진 충격에 응답하기 위해 이런 틀의 회의를 기획했다고 답해주었다.

 

도대체 그 충격이 무엇이기에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파괴하자는 발상에 이르렀을까? 증폭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의 질문 공세는 이어졌다. 대충 이런 내용의 질문 이었던 것 같다. 사실 지진과 원전사태는 인문사회과학의 무능을 드러내준 것 아니냐, 자연재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과학기술의 가공할만한 파괴성과 국가행정조직의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관료주의를 드러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은 규범적이고 원론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거나 국민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무사 안일한 내셔널리즘에 몸을 내맡긴 것 아니냐, 이런 질문이었다.

 

고바야시 교수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인문사회과학자의 반응이야말로 이 업계가 기술합리성에 매몰된 결과라고 말을 이어갔다. 즉 사태의 근본으로 물음을 끌고 들어가는 대신 기술비판이라는 규범이나 내셔널리즘이라는 국민 위로의 언설에 기대는 것이 기술합리성의 발로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인문사회과학의 앎이 이렇게 무능하게 된 데에는 연구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것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형식에 원인이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는 틀에 짜인 글을 매개로 해서만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형식이 인문사회과학자들을 기술합리성에 종속시켰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고바야시 교수는 이런 까닭에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좀처럼 사태 자체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사태 자체에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것보다 사태를 어떻게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제 속으로 환원하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환갑이 넘은 노교수는 이런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기술합리성을 파괴하기 위해 형식 파괴적인 학술회의를 기획한 셈이다. 허공에 대고 말을 하고 문장에만 눈을 두는 회의 형식을 탈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논리와 형식으로 무장한 논문은 인문사회과학의 중요한 표현 양태이다. 하지만 논리와 형식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정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자유로운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일회적 만남과 커뮤니케이션의 긴장과 혼란으로부터 어떤 질서의 망을 엮어낼 것인지가 인문사회과학자의 본령이기에 그렇다. 대지진과 원전사태라는 이해의 지평을 넘어선 사태와 맞서서 인문사회과학이 유통되고 소통되던 형식을 바꾸자는 발상은 그래서 신선하고 소중한 것으로 느껴졌다. 지진으로 생활세계를 파괴당하고 방사능의 공포로 미래를 저당잡힌 사람들에게 뻔한 기술비판이나 내셔널리즘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은 이번 사태를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미지의 사태와 대면시켜 파괴하는 일을 감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참신하고 심오한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담아내고 전달하는 그릇 자체를 뒤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인문사회과학은 영원히 대면할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대지진과 원전사태와 마주하려는 그 실험이 도쿄와 교토의 한 회의장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 함께 했음이 앞으로 동아시아 지성계에 어떤 영향을 남길까? 인문사회과학의 갱생을 꿈꾸는 자들이 응답해야 할 남겨진 물음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서남포럼. 201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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