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우리의 다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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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11 11:30 조회21,7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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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초, 연변을 다녀왔다. 중국공산당 창설 90주년 기념행사의 열기가 채 잦아들지도 않은 순간에 50년 만에 귀향하는 정수일 선생과 동행한 여행이어서 조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 방문하는 연변이었기에, 고양된 감정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연변의 모습은 어떠하며, 그것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었다.
연변 최대의 화제는 백청강이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백청강 이야기를 하였다. 대중의 관심사에 잘 부응하여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기획한 <위대한 탄생>이라는 스타 만들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여 화제가 된 인물인데, 바로 연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인기 프로의 첫 우승자가 된 화려한 신인가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연변 사회의 새 영웅으로 등장하였다. 연변 조선족의 꿈을 이룬 인물로 탄생한 것이다.
연변 사람들의 꿈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과거의 꿈은 무엇이었으며, 지금의 꿈은 무엇일까? 함경도 지방의 조선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두만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경작지를 찾았다. 1860년대 말기부터 시작된 몇 차례의 자연재해로 기근이 들자, 조선 사람들의 이주 행렬은 더 길어졌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청나라에서 변방지역의 개간과 관리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의 이주를 유인하기도 하였다. 지난날 그들의 꿈은 먹고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새터에 정착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꿈은 어떤 것인가? 한국으로 내려와 돈을 버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성공하는 것이다. 비약적 경제발전에 성공한 한국은 21세기 개막을 전후하여 과도한 소비주의의 후유증을 앓기 시작하였고, 세계화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노동시장의 재편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회에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로 들어왔고, 같은 민족에 언어장벽이 없는 연변 조선족은 한결 유리하였다. 그들은 두만강을 되넘어 오되, 북한을 건너뛰어 남쪽으로 와야 했다. 안착할 땅과 굶주림을 면할 양식이 아니라, 이제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어야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연변의 조선인은 누구인가? 과거 두만강을 넘었다가, 한 세기가 지나 다시 남쪽으로 되넘어오려는 그들은 누구일까?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까? 과거 조선인이었고 지금은 조선 혈통의 중국인에 불과한 존재들인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면서도 불안한 잠재적 요소를 지닌 불편한 세력인가? 동포인가, 새로운 계층인가, 필요악적 노동력인가?
다시 백청강으로 돌아가보자. 백청강은 서울에서 받은 상금의 절반은 물론 금의환향하여 연변에서 연 공연의 수익금 절반도 기부하여 더 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애당초 서울의 일각에선 백청강을 바이칭강으로 읽고 표기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외래어나 외국어 표기법의 규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연변에서는 아무도 백청강을 바이칭강이라 쓰거나 부르지 않는다. 연변 사람들에게 백청강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아듣지만, 바이칭강이라면 아마도 잠시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그런 작은 사태 하나에서 기묘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연변의 공항에 내렸을 때다. 이때 연변의 공항이란 연길공항을 말한다. 연변은 길림성의 일부 지역으로, 정확히 조선족연변자치주를 일컫는 말이다. 연변의 주도는 연길이고, 연변을 포함하고 있는 길림성의 성도는 길림이다. 연길공항 청사 전면 위쪽에는 크게 한글로 ‘연길’이라 써 붙이고 그 옆에 한자를 병기하였다. 한국에서 발행한 비행기표에는 ‘옌지’라고 표기돼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길림’은 ‘지린’으로, ‘연변’은 ‘옌볜’으로 쓰고 읽어야 옳다고 한다. 하지만 연변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치주의 모든 간판만 하더라도 한글을 우리식 발음으로 쓰고 한자를 병기한다. 백청강이란 이름의 발음과 표기 논란에 대하여 한국의 국립국어원은 “조선족 이름 표기에 관한 원칙은 없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에서 두 가지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두만강을 넘어 정착한 조선족들의 정체성 유지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조선족을 규정하는 우리 정부나 기관의 태도다. 그들은 중국 국적자일 뿐일까? 아니면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연변조선족인가?
형식적으로는 국적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것이 명쾌하게 정리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국적은 근대국가가 성립하여 헌법을 제정한 이후에 생긴 개념이다.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 연변으로 갈 시절에는 개인이 처한 신분에 따라 살아갈 뿐이었다. 왕정이 종말을 고하고 입헌국가가 수립되면서 국적법이 제정됐고, 국적을 부여하였다. 중국이나 러시아 또는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의 사정은 저마다 달랐지만, 연변의 조선인들은 정세의 변화에 부응하여 살아가기 위해 중국 국적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국적 선택에 자발적 의사가 크게 좌우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어문규범을 세워야 할 국립국어원이 “원칙은 없다”라고 한 것은, 연변조선족을 보는 우리 정부의 태도를 상징하는 면이 있어 씁쓸하다.
연변조선족의 꿈은 어떻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한족이 외면한 연변 땅을 손발이 닳도록 일구었다. 머리를 깎고 호복을 입지 않으면 땅을 빼앗기는 횡포를 당하기도 하였고, 봉건관료들의 약탈을 견뎌야 했으며, 일제식민지를 탈출해야 했다. 그리고 황망히 자본주의 세상을 맞아 돈을 벌기 위하여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연변조선족의 꿈이 시작된 용정은 이제 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연길에 넘겨주었다. 연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는 못하면서 소비도시로 번창하고 있다. 부모들은 기회만 생기면 한국으로 떠나고,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지위에서 열심히 벌어 연길에 남은 자식들에게 몇푼이건 보낸다. 그 돈은 향략을 부추긴다. 젊은이들은 학교보다 거리를 배회한다. 노래방, 피시방, 안마방이 도시의 숲을 이룬다. 소수민족대학으로 중국 100대 대학에 들어갔다고 자랑스러워하던 연변대학에도 한족 학생들이 훨씬 더 많아, 강의도 모두 중국어로만 한다. 거리 간판의 글씨도 한글의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연길을 비롯한 도심의 조선족은 줄어들고 한족이 늘어난다. 시골에도 사람이 없어, 조선족이 비운 자리에 가난한 한족들이 들어가 살고 있다.
연변조선족의 꿈은 백청강의 성공이 상징하고, 연변 사회는 놀라운 속도로 바뀌고 있다. 여기서 결론은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연변의 지금을 살펴보고 미래를 가늠하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우리의 다른 모습이었다.
차병직 변호사
(서남통신 20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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