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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아흔,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노년의 자기돌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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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1-07 14:48 조회4,6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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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계관시인 도널드 홀은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들을 모아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책의 맨 앞에 배치된 글, ‘창밖 풍경’은 두 가지 면에서 ‘여든 이후 삶’의 심리적·신체적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우선, 나이가 많이 들어 외출이 어려워지면 창밖 풍경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감지된다. 핵심은 ‘주의깊게’에 놓여 있다. 그러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바깥나들이가 완전히 불가능해지면 창을 통해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사계절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유일한 외부와의 연결이 된다. 창을 통해서 외부가 내부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창을 통해서일지언정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다르게 등장하는 풍경을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태도는 단순히 심성이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훈련의 문제다. 어떤 해의 어떤 계절도 앞선 계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젊었을 때부터 경험해온 사람이어야 당장 내일 죽더라도 오늘까지 창밖 내다보는 일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도널드 홀은 휠체어에 앉아 창밖 외부 세계를 내다보는 일에 열심이었고, 그때 관찰한 사실과 느낌을 에세이로 담아냈다.

더 나아가 ‘창밖 풍경’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생애 마지막 10년을 창밖을 내다보며 살았던 저자의 어머니를 추모하는 일이다. ‘혼자 생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 그의 어머니는 10년간 즐겁게 창밖을 내다보며 아흔이 될 때까지 자기 집에서 살았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울혈성 심부전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후 집 근처 병원에 딸린 시설에 머물다 아흔한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세상과 이별했다.

책읽기를 멈춘 적이 없는 그의 어머니는 말년에 특히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자꾸 내용을 까먹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흔이 돼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한 번 읽은 탐정소설을 2주 후에 또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중 누가 범인인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흔이 될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고 책을 읽으며 홀로의 일상을 꿀잼으로 사는 ‘할매’의 이 말에, 60대 중반에 접어든 나도 엄지척을 한다.

나이가 드는 것과 무관하게 ‘재미’를 누릴 수 있다면, 아흔이어도 ‘잔치는 끝나지 않는다.’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창밖 풍경도 내다보는 게 재미있고, 내용을 기억하든 못하든 책 읽는 것이 늘 괜찮은 소일거리가 되는 그런 감정의 상태가 저절로 얻어질리 만무하다. 기억력이나 인지능력, 체력이 이전과는 판이해져도, 호기심과 흥(興)이 완전히 말라버리지 않도록 자기를 잘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필수적인 자기 돌봄이다.

발효 콩 낫토를 여러 번 휘저으면 가느다랗고 끈기 있는 선들이 생긴다. 호기심이나 흥, 또는 자발적 생성의 끈기 있는 선들이 살아남으려면 휘저어야 한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느낌, 이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반복일 뿐이라는 생각, 어차피 기울고 사위는 일만 남았다는 느낌의 최면에 맞서 ‘그래, 기울고 사윈다. 그런데 진실을 향해 기울고 진실을 향해 사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고요하고 깊은 보람을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호기심과 흥의 발효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데,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발효균을 많이 내장하고 있는 사람은 다행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천성적으로 있는 발효균조차 죽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 자기 돌봄의 기술에 좀 더 신경을 쓸 일이다. ‘잠시만 게을리 지내자’고 한 것이 불가역적 무능으로 굳어질 수 있다. 호기심을 유지하고 흥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한 자기만의 기술을 발견 또는 개발하고 체화된 습(習)으로 만들자.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충청리뷰 2022년 10월 5일 

https://www.cc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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