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죽을’ 고비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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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2-07 15:09 조회4,7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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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벌어진 기가 막힌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에서는 두 명의 노동자가 갱도에 묻혀 고립되는 사고가 벌어졌다. 정확한 시간은 지난 10월26일 오후 6시. 이태원 참사는 10월29일 밤 10시20분 즈음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초저녁부터 참사의 전조가 사방으로 타전되고 있었다. 시간 순으로는 아연 광산 노동자들이 먼저 갱도에 고립되고 나서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것인데, 우리는 그사이에 아연 광산 노동자들을 잊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산재 사고는 이제 일상적인(!) 소식이어서일까. 아무튼 이태원 참사가 벌어지고 난 다음에야 아연 광산 노동자들에게 이목이 쏠린 게 사실인데, 다행히도 221시간 만에 광산 노동자 두 분이 구조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이태원 참사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함께’ 있지 못하도록 국가 시스템이 강제한 결과다. 아연 광산에 매몰된 두 노동자는 단둘이어서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함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군중이 되는 순간 ‘함께’ 있지 못한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참사 며칠 뒤에 마음이 괴로운 ‘스스로를 위해’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찾아가 경찰 통제선 안의 참사 장소와 그 일대를 둘러보며 그날의 아비규환을 상상해봤다. 좁은 골목길과 지하철역 인근 인도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었는지 아뜩하기만 했다. 국가 시스템의 보호도, 안내도, 적절한 치안도 없었다면 이미 인파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하철의 무정차 통과라도 있었다면 소용돌이는 해일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 우리를 ‘함께’ 있는 대신에 무분별한 군중(mass)이나 개별자로 살아가기를 끊임없이 강제하는 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며 이것을 잘 운영하는 게 근대국가의 본질이다.
에너지 엉뚱한 데 써 다른 곳 공백
그날, 이태원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타전하기 시작한 참사의 전조는 가볍게 무시되었다는 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인데, 선거 때만 주권자인 이들보다 ‘더 큰 국가’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더 큰 국가’에는 사법적인 사고‘만’ 할 줄 아는 불구가 있다. 그래서 참사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인과관계만 강조한다. ‘더 큰 국가’의 에너지가 온통 엉뚱한 데에 쏠려 있다면 다른 곳에서 공백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 정권 들어서 뉴스는 전 정권과 야당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연일 보도하고 있으며, 한반도상에는 내내 군사훈련이 벌어졌다. 이렇게 국가의 에너지가 ‘정치 보복’과 군사적 긴장 고조에 쓰이고 있으니 실제 국민들의 안녕이나 복지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도 우리는 ‘함께’ 있는 능력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진영 논리 또는 팬덤 현상이라고도 부르던데, ‘함께’ 있는 능력의 상실이 현 정권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한 가지 사실에도 해석이 제각각이고, 자기 해석을 인정받고자 사실을 일으킨 ‘진실’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진실의 성격과 모양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진실이 내보이는 꼬리는 9개를 훌쩍 넘어 900개는 되는 것 같은데, 각자 잡은 꼬리를 가지고 진실의 몸통을 잡았다는 아집에 빠져 있는 게 지금의 형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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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면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모아보면 그냥 더미(dummy)다. 군중과 언어의 더미는 얼마나 가까운지! 각자 진실의 꼬리 한두 개만 가지고 있으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문제는, 진실이 단순히 꼬리의 합(合)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꼬리의 합이 진실의 몸통이 되려면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 공감하는 합의 공식(公式)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깨져버린지 꽤 되었다.
함께 살지 않으면 참사 되돌아와
기왕의 규범과 척도는 유명무실해졌고 새로운 규범과 척도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사실 진영 논리나 팬덤 현상은 이런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의 말만 앞세우거나, 큰소리로 우기거나, 말해놓고도 안 했다고 잡아떼거나, 법정에서 보자는 협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언어가 제 변호와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한 현실은 암울하기만 한데, 221시간 만에 살아 돌아온 아연 광산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믿음과 과제를 동시에 던져준 것만 같다. ‘함께’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죽을 고비’에 우리 모두 빠져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죽을 고비’는 피해 가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함께’ 살지 않으면 참사는 언제든 되돌아온다. 이 일에 정치는 직접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문학에는 언어의 건강을 회복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오늘날 이만한 문학의 정치가 있을 수 없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2년 11월 21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12103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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