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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삐라로 보는 8·15 직후의 정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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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12 10:16 조회21,4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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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라'라는 단어는 원래 영어의 bill을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불완전한 음운체계에 맞추어 어색하게 표기한 것을 다시 우리가 경음화해서 받아들인,좀 이상한 외래어이다. 국어사전에는 전단(傳單) 또는 전단지라고 풀이되어 있다. 전쟁 중 일선 병사들이나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살포해서 전의를 떨어뜨리고 민심을 교란하는 심리전 목적의 선전용 문건을 흔히 삐라라고 불렀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몰래 퍼뜨리는 전단도 삐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1940년대 초 나치스시대의 독일에서 뮌헨의 대학생들이 야간에 벽보로 붙이거나 우송했던 문건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에게 비밀리에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참가자들끼리 나누어보려고 제작한 성명서 또는 항의문 같은 것도 삐라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을까. 1970년대에는 나 자신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또는 '해직교수협의회'의 이름으로 더러 성명서를 써서 금요기도회 같은 자리에서 낭독한 적이 있지만, 그것을 삐라라고 의식한 적은 없었다. 동일한 내용의 문건이라 하더라도 공식적 경로를 통해 배포되기 위해 만들었을 경우에는 삐라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아무튼 삐라라는 말이 갖는 살벌하고 불법적인 이미지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해방 직후, '삐라'를 한데 묶다

그런데 광복절을 앞두고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며칠 전 나는 출판사 측의 호의로 그 책의 가제본(假製本)을 얻을 수 있어서, 한동안 거기에 빠져 해방 직후의 정치상황 속을 헤매다 나왔다. 먼저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삐라의 개념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앞에서 내가 살펴본 내용보다 이 책제목의 것이 훨씬 광범위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1945년 8·15 해방 당일부터 3년 동안 수많은 유명·무명의 기관, 단체, 정당, 개인들이 공식·비공식으로 발표한 성명서, 선언문, 호소문, 결의문, 격문, 포고문, 포스터, 표어, 전단 등 무려 443건을 수집하여 영인하고 본문을 현대문으로 번역해놓은 자료집이기 때문이다. 편저자 중의 한 분은 한국 근대문학 전공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한 분은 현직이 광업회사 전무이사라고 되어 있어, 복잡다단한 근·현대사의 이면을 탐색하는 데에 비전문가의 노고가 이렇게 중요한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하나의 모범사례가 될 듯싶다.

내가 보기에 여기 수합된 자료들은 그동안 현대사 학자들이 축적한 연구의 내용을 실물의 제시를 통해 뒷받침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내용을 뒤집거나 결정적으로 보완할 자료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처럼 현대문학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 정도가 아니라 현대사 전문가라면 더 예리하게 파고들어 자료집의 가치를 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문건 자체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마치 당시에 찍은 필름을 통해 직접 현장의 사건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흥미로운 문건들이 많지만,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헌병대 사령부' 명의로 발포된「내선 관민에게 고함(內鮮官民ニ告ク)」이라는 간략한 일본어 포고문이었다. 제1항은 "정전협정은 이제부터 시작되지만 지금 바로 연합군이 진주해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연합군에 대한 일본제국의 '무조건항복'을 감히 '정전협정'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더러 연합군이 당장 진주해오는 것도 절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누구에게? 불안에 떨고 있는 조선 내 일본인들과 기고만장 우쭐해 있는 조선인들에게. 다음 제2항은 "조선이 독립한다 해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이 내지로 철수하기까지는 법률과 행정 모두 현재대로이다"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까지는 행정과 사법의 모든 권한을 여전히 일본이 쥐고 있다는 것을 조선헌병대 사령부는 당당히 선포하는 것이다.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의 진실

위의 포고문과 연관지어 눈에 띄는 문건은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 명의의 「급고(急告)」이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연합군 일부가 7일에 입경할 예정이던 바 천후(天候)관계로 인하여 8일로 연기되었습니다." 9월 7일로 예정되었던 미군의 서울 진입이 날씨 때문에 하루 연기되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다. 이어서 문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시적이나마 아직 경찰력이 일본인의 장중(掌中)에 있는 것을 기화로 그들은 우리를 일본국민의 형식으로 가두 환영행렬에 참가시키고자 탄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1945년 9월 8일 현재에도 식민지체제가 온존하고 있어서, 만약 그날 미군 환영행사에 시민들이 나간다면 그것은 애통하지만 조선인의 자격이 아니라 일본국민의 자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문건은 알려주고 있다.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포고 1」이 발표된 것은 인천상륙 전인 9월 2일이고 삼팔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선포는 9월 9일이지만, 그것은 이 책에 없다. 다만 9월 29일자 발표가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의 선입견을 깨는 것은 발표문이 '조선인 제군이여!'로 시작하는 국한혼용체의 것과 '告韓國民諸彦'으로 시작하는 일본문의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조선인에게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과연 포고문의 (바)항은 "경기도는 현재 미군정하에 있으며 일본인 경찰관은 차차 파면되고 그 대신 조선인 경찰관이 배치되고 있는 중인 것"이라 하여, 그제서야 경찰관이 일인에서 조선인으로 교체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배치된 조선인 경찰이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인 상관으로부터 훈련받은 인력이라는 점이다.

물론 8·15 직후의 정치풍경이 이렇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일제의 경찰력이 버티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고, 각계각층에서 각양각색의 정치적 욕구가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그 분출의 시점으로부터 66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때의 정치적 욕구에 어떻게 대답해왔던가, 이제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프레시안. 201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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