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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위기는 부실한 복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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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22 12:15 조회21,2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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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채 신용등급 강등 사태를 계기로 보수세력들은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처럼 힘을 받은 복지국가론이 난관에 봉착했다.
필자는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민주당 긴급경제대책회의, 각종 언론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안정 우선의 금융통화정책과 민생을 돌보는 적극적 재정정책의 조합이 올바른 정책 대응임을 주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위기는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오히려 부실한 복지에 대한 경고임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 국채 신용등급 강등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채권의 신용등급 강등이란 채무 불이행의 가능성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탠더드앤푸어스(S&P·이하 에스앤피)의 주장이고 대다수 언론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정치권이 재정적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보이고 그에 따라 미국 정부가 돈을 갚지 않을 우려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채무 불이행은 상상하기 어렵다. 최악의 경우 돈을 찍으면 되기 때문이다.(유로화를 화폐로 사용하는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마음대로 통화를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채무 불이행의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미국 국채가 절대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돈을 찍어 채무를 이행한다는 것은 곧 인플레이션을 의미하고 그것은 채권의 실질수익률을 떨어뜨린다. 미국 국채에 대한 위험도란 실제로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말하는 것이다. 미래에 인플레이션이 상승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면 장기국채의 가격이 떨어진다. 인플레이션으로 손해 볼 것에 대비해 명목수익률이 그만큼 높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와는 정반대다. 전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가운데 미국 국채의 가격은 오히려 오르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 장기국채의 가격이 오른다는 사실은 채무 불이행 가능성도 없거니와 향후 인플레이션 리스크도 거의 없다는 시장의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경기가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주가 폭락과 기대 인플레이션율 하락을 불러온 것이다. 민간 소비수요가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경기를 이끌어오던 정부가 이제 긴축재정으로 돌아서게 되니 경기전망이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준비은행도 향후 인플레이션 우려보다는 경기침체 우려가 크다고 보고 2년간 초저금리 유지를 천명했다. 투자가들은 비록 에스앤피의 그릇된 논리를 반박할 능력이나 동기는 없을지라도 경제의 실제 향방에 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적자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긴축재정이 문제라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리먼브러더스가 망하는 순간까지 A등급을 주었던 에스앤피의 논리가 시장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도 않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재정건전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아직도 우리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본 지면을 빌려 대중적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2000년 4월6일치 ‘균형재정의 신화 경계한다’).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이 긴축재정을 요구하여 경기침체를 악화시키고 있었기에 이 정책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추후에 국제통화기금도 잘못을 인정하였다. 경기침체 때 세수 감소에 따라 적자가 발생하는데 건전재정을 이유로 재정긴축을 하게 되면 경기악화를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재정여건을 더욱 어렵게 한다. 미국의 후버 대통령이 은행위기를 대공황으로 악화시킨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최근 영국의 폭동사태 배후에도 오도된 재정긴축이 있다. 미국의 재정긴축은 지금 세계적인 금융혼란과 경기둔화를 초래하고 있다.

물론 한없이 재정적자로 경기부양을 할 수는 없으며, 중장기적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평상시에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재정 부실이 문제 되는 나라들은 복지가 부실하여 조세저항이 심한 나라들이다. 반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복지국가들은 재정이 매우 튼튼하다. 복지를 제대로 갖추면 거품성장을 추구할 필요가 없어 경제가 안정되니 적자재정 편성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또한 세금도 충분히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한겨레. 201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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