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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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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28 15:40 조회25,7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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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불평등 협정이다. 미국은 이 협정이 발효돼도 국내법을 거의 개정하지 않는다. 법률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원칙적으로 미국법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선 이 협정이 기존의 국내법에 우선한다. 따라서 한국은 이 협정과 부딪치는 모든 사회경제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그것도 대부분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 조정과 개입을 억제하거나 금지하는 방향으로의 (철 지난) 신자유주의적 개정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투자자-국가소송제, 서비스 개방의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 역진방지조항 등 이 협정에 포함된 독소조항들은 공익의 유지나 증대를 위한 시장에서의 국가 역할을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결국 대기업과 대자본가 등 시장의 강자들은 더 큰 힘을 갖게 되고, 노동자·중소기업·자영업자 등 약자들은 더 외롭고 힘든 처지에 몰릴 것이다. 누군가 이 협정을 ‘제2의 을사늑약’이라고 불렀다는데, 한국의 사회경제적 약자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타당한 일컬음이다.

 

99%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한국에서도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시민이 주인이라는 민주국가 한국에서 이 대다수 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불평등 협정이 어떻게 그토록 강력히 추진돼 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선 한국의 민주주의가 ‘승자독식’체제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체제에서는 선거경쟁에서 승리한 특정 인물 혹은 정당이 거의 모든 정치권력을 독차지한다. 행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의회에선 단독 다수당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한·미 FTA는 한나라당이 국회 다수당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추진했다. 행정부와 국회를 지배하는 두 세력이 뜻을 같이하니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이 같은 경우엔 시민사회로부터 유리된 대통령의 독주와 독선, 그리고 심지어는 실질적인 독재도 합법적으로 가능한 민주주의가 바로 한국형 승자독식체제이다.

 

노 대통령은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를 목격하며 한·미 FTA 수정 필요성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노무현의 복심’이라던 유시민 전 장관은 최근 한·미 FTA 추진 사실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참여정부의 여당이던 지금의 민주당도 야당이 되고나서는 서서히 그 시각이 바뀌더니 이제는 재재협상을 요구하며 비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 정부에 들어와 과거의 한·미 FTA 추진세력들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처지에 공감하게 되며) 반대 혹은 신중 세력으로 돌아서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 진보정당들은 외롭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미 FTA 추진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 협정에 대한 현 대통령의 개인적 소신은 전임자보다 더 강하고, 한나라당은 여전히 국회의 단독 다수당인 데다 여당이기까지 하다. 한국형 승자독식체제가 지속되는 한 반대세력의 확대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미 FTA만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은 무시된 채 오직 집권자나 집권당의 독선적 판단만으로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를 해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선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합의제’ 방식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 물론 종국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야 할 것이나, 우선 급한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복수의 유력 정당들이 제도정치권에 포진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 일은 비례대표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할 경우 조기에 이룰 수 있다. 다수의 유력 정당들이 부상하면 특정 정당이 단독 다수당이 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정당들 간의 협의나 합의에 의해 가동되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은 이때부터 가능해진다. 이렇게만 돼도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이 무시되는 경우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상당한 힘을 가진 그들의 정당대리인이 정치과정에 상존해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 재재협상과 함께 비례대표제의 강화를 야권연대의 공동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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