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운] ‘화교배척법’ 사죄결의안과 ‘황화론’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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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28 15:46 조회24,3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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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 상원에서 ‘화교배척 법안(Chinese Exclusion Act)’에 대한 사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10월 6일). 1882년 미 연방정부의 승인 아래 제정된 ‘화교배척법안’은 1904년까지 수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거쳐 중국인의 이민 금지, 미국 국적취득 금지, 백인과의 통혼 금지 등을 망라한 이른바 ‘종족차별법’으로 확장되었다. 1943년 폐지되긴 했지만, 2차대전 중 새로이 떠오른 ‘황화(黃禍)’ 일본에 공동으로 방위할 동맹국이었던 중국을 다독이기 위해 제한적으로 시행됐을 뿐이다.
현 인구수 400만, 아시아계로는 최대 이민집단인 재미화교의 이민의 역사는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골드 러시(Gold Rush)와 뒤이은 대륙간 횡단철도(the First Transcontinental Railroad) 건설은 막대한 노동 인력을 필요로 했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군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전란과 빈곤에 허덕이던 수많은 하층민들이 미국행 배에 올랐고, 그들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을 미국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채금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이민 채금자에 대한 현지인의 반감이 증대했다. 여기에 남북전쟁의 여파로 인한 경제불황 속에 반(反)중국인 정서는 정치적 이슈로 악용되기에 이른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반한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역사에, 특정 종족에 대한 질시와 배척을 명시한 법안이 60여년이나 효력을 지속했다는 것은 분명 모순적이다. 애초의 법안은 중국인 노동자의 추가 입경을 향후 10년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4년의 개정안에서는 기존 중국인 이민자들에게도 추방을 명했고 1902년에 이르러 이 법안의 효력은 무기한 연장되었다. 여기에는 저임금과 실업 등 미국 내 노동문제를 중국인 쿨리에게 전가하려는 정치적 전략이 작용하고 있었다. 1880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노동조합 연합으로 흑인과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했던 ‘노동기사단(the Knight of Labor)’이 ‘화교배척법안’의 적극적 지지자였다는 사실도 아이러니컬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로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황인종에 대한 공포(Yellow Peril)’가 서구인의 마음 속에 기괴한 형상으로 자라왔다는 사실이다. 1898년 영국에서는 산둥반도 자우저우만(胶州灣)에서 독일 선교사가 성난 주민들의 손에 살해된 사건(1897년)을 그린 쉴(M.P. Shiel)의 소설 황색 위험Yellow Danger이 출간되었고, “동방에서 온 왕들”이라는 「요한계시록」의 한 문구를 극화한 황화 – 동서양의 대결The Yellow Peril: or, Orient vs. Occident(1911)이 미국의 거물급 종교인사(G. G. Rupert)의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다. 1930년대 서구 통속소설에서 ‘황화’는 가장 인기 있는 테마 중 하나였다. 이 무렵 영국인 작가 색스 로머(Sax Rohmer)에 의해 탄생한 인물 ‘푸 만추 박사(Dr. Fu Manchu)’는 황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잠재적 신경증의 표출이라 할 만하다. ‘의화단의 난’(1900) 이후 몰락해간 청대 황족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푸 만추’는 서구 제국주의자에 테러를 일삼는 어느 비밀결사집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간 ‘푸 만추’의 형상은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만화, 음반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1932년에 제작된 헐리웃 영화 <푸 만추의 가면 The Mask of Fu Manchu>에서 그는 백인종과의 전쟁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정복자 징기스칸의 현신으로 그려졌고, 1933년과 1959년의 소설 <푸 만추의 신부The Bride of Fu Manchu>, <황제 푸만 추Emperor Fu Manchu>에서는 영국과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악한 천재 연금술사로 그려졌다. 아울러 2차대전 중에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상의 유포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푸 만추’는 황색 공포의 집약체이자 서구 사회를 위협하는 모든 악의 결정(結晶)이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슈가 많은 때여서인지 이번 ‘화교배척법안’ 사죄 결의안의 통과는 세간의 주목을 좀처럼 끌지 못했다. 국내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주요 매체들을 살펴봐도 눈에 띄는 기사나 논평이 드물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의 연이은 금융 파탄을 겪으면서 중국의 부상에 한층 민감해진 ‘중국위협론’이 미국 주류 언론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 법안 통과를 두고 ‘중국 굴기(屈起)’의 결과라거나 ‘중미간의 대등한 역관계의 반영’이라며 반색하는 중국 언론의 논조도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화교배척법’ 사죄결의안이 통과된 이 의미 깊은 순간에도, 지난 세기의 문명적 적대감이 여전히 세계에 팽배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다소 황당한 망상에 가까웠던 과거의 황화론에 비한다면, 중국이 초강국으로 떠오른 지금이야말로 황화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더 크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이번 법안의 통과가 ‘1882 프로젝트’라는 민간단체의 조직적 힘에 힘입은 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계 미국인 시민단체는 물론 일본계 및 유대계 미국인 민간단체들의 연대 위에 추진된 이 프로젝트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마침내 상원에서 만장일치 통과라는 결실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은 하원 결의안 통과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아무쪼록 이번 사죄결의안의 통과가 미국의 정신과 가치를 되묻는 데서 더 나아가, 보이지 않게 세계를 지배해온 종족대결 구조를 반성하는 계기로서, 동서 양쪽에서 진지하게 반추되기를 바란다.
백지운(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서남통신. 201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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