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정당 수급 불균형 깰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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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1-22 11:17 조회21,70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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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선호와 이익이 정책결정과정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리인, 즉 ‘자기 정당’을 갖고 있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주 행위자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 서로 나뉘어져있을 경우, 정당들은 그 사회적 균열구조에 상응하는 만큼 다양하게 존재해야 한다. 갈등관계에 있는 주요 사회세력들을 빠짐없이 대변할 수 있는 복수의 정당들이 서로 길항관계를 유지하며 포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 혹은 정책 결정이 사회경제적 강자집단의 이익에 편향됨이 없이 ‘민주적으로’ 내려질 수 있고, 그래야 사회통합이 유지될 수 있다. 사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제도적 기제를 통해 사회적 균열을 정치적 균열로 전환시켜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한다는 데에 있다.
한국사회의 균열구조는 양대 정당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기해진 지 오래이다.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라고 여기는 시민들은 오히려 소수이다. 다수는 소위 무당파들이다. 이는 무소속 시민운동가가 당선된 이번 서울시장 보선 결과와도 상관있는 일이다. 이들 다수의 시민들은 기존 정당들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지 오래고 이제는 각기 새로운 ‘자기 정당’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을 게다. 그중의 일부는 아예 정당정치 대신 시민정치가 제도화되는 상황까지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철수 현상’도 일정 부분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다차원적인 사회경제적 균열은, 그리고 거기서 파생하는 복잡다단한 사회갈등은 그에 상응하는 다차원적인 정치 균열 체계에서 조정되고 관리돼야 한다. 급증하고 있는 새로운 정당 수요에 부응하여 새롭고 다양한 정당들이 더 많이 공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소수의 명망가나 지역 기반에 의지하여 기득권 지키기로 버텨온 양대 정당 체제의 존속을 묵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경향신문의 최근 제안은 시의적절할뿐더러 통쾌하기조차하다. 경향신문은 창간 65주년을 기념해 ‘사회계약을 다시 쓰자’는 캠페인을 벌이며 그 일환으로 “다수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는 현 정치질서를 깨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례대표제가 획기적으로 강화돼야 유럽 선진국들에서처럼 시민사회의 정당 수요에 따라 녹색당, 해적당, 노인당 등의 새 정당들이 적기에 공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뉴질랜드의 정당 수급 불균형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했던 뉴질랜드 헤럴드(New Zealand Herald)를 생각나게 한다. 노동당과 국민당의 양당체제에 대한 뉴질랜드 시민들의 신뢰는 1970년대 이후 급속도로 낮아졌다. 반면 제3당에 대한 기대와 지지는 급증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제3당(들)의 득표율이 언제나 20%를 전후할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유력정당은 부상하지 못했다. 득표율이 높다한들 그 표의 대부분이 2위 이하의 후보들에게 가는 이상 신생 정당들이 상당한 의석을 차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1981년의 총선에서 신생 사회신용당은 무려 20.7%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의석점유율은 2%에 불과해 겨우 2석을 얻었다. 1위가 아닌 후보에게 던져진 표는 모두 사표(死票)가 되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의 비비례성 때문이었다.
답답한 현실이 지속되자 정치개혁파가 늘어갔다. 그들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지역구 1등을 많이 배출해낼 수 있는 거대 정당에만 유리하다는 점, 그래서 양당제를 존속케 한다는 점, 결국 다양한 민의가 정치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질 못한다는 점 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 개혁파 대열의 선두에 뉴질랜드 헤럴드가 있었다. 그것은 1993년 뉴질랜드의 선거제도가 마침내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바뀌던 그날까지 그러했다. 한국의 정당 수급 불균형 문제를 본격 제기한 경향신문의 미래 모습이 바로 이러하길 바란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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