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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고단한 한국형 진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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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30 14:15 조회20,9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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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임진년이 밝았다. ‘87년 체제’의 말기적 현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현대사에서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어온 우리에게도 정신적 고통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4년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치열한 민주화운동이 만들어낸 성과가 한 번의 정권교체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이토록 국민들의 관심사에 대한 반응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이 고통의 시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시점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 시기는 한국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겠지만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선진화’라는 구호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국민들이 고단한 삶을 한꺼번에 해결해줄 수 있다는 성장주의에 매료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우리 사회도 이제 ‘선진’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국민들의 자부심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4년은 성장주의의 문제를 깨닫고, 선진화도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국민들이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선진화와 관련해서는 진보개혁적 정치세력과 지식인 내에서도 방향은 다르지만 마찬가지의 환상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한국의 정치사회가 서구식의 ‘보수와 진보’ 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교체를 이러한 정책적 오리엔테이션의 변화이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도 냉전 시기 수구적 보수와는 구별되는 ‘신보수주의’로 규정되었다. 이제야말로 보수와 진보의 본격적인 정책경쟁이 가능하게 되었고 진보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진보의 앞에 놓인 길은 그리 편한 길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는 ‘신’이라는 수식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지 새로운 보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된 신보수주의적 정책의 몇몇 아이템을 빌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행태에서는 권위주의적 시기의 수구적 보수와 큰 차이가 없었다. 권력을 개인이나 소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태는 과거에 매우 익숙한 현상이지만, 부서별로 해당 품목의 물가안정을 책임지라는 식의 ‘물가안정책임제’는 권위주의 시절에도 생각하기 쉽지 않은 정책이다. 반북냉전이데올로기도 그 어느 때보다 극성을 부렸다.

 

이명박 정부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민심의 이반을 초래한 것도 국민의식의 성장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수구적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사회의 선진화는 수구적 행태를 청산할 때 가능하다는 현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진보도 수구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그리 ‘진보적’이지 않은 과제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현재 서구의 진보들이 수행했던 과제만이 아니라 보수 혹은 자유주의적 세력이 수행했던 과제도 같이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분단체제라는 특수성이 한국의 진보에 지운 과제이다. 서구의 진보도 이러한 이중적 과제를 짊어져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 사건에서 군 장교이며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을 옹호할 이유가 없다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왕당파와 반유대주의에 대항해 자유주의자 등과 연합해 드레퓌스 옹호를 위해 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나도 수구라는 낡은 행태들과의 싸움 속에서 진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현실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형 진보가 가야 할 고단한 길이다. 그 길에 비약은 없으며 운명의 2012년도 이 고단한 길을 얼마나 지혜롭게 가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국학
(경향신문. 201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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