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한반도의 내일을 위한 진단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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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2-01 11:22 조회21,5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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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직전에 출간된 백낙청 교수의 새 저서『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1) 때문에 연휴를 기약잖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었다. 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나름의 ‘신년구상’을 해보게 되는데, 총선·대선 같은 중대한 정치행사가 기다리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책은 그런 실용적 목적에도 부응할뿐더러 올 1년간 일종의 독서노트를 다산포럼에 연재하기로 한 약속을 시작하기 위해서도 안성맞춤이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재작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의『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 2011.6)를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 두 저서는 당면한 현실의 위기적 성격에 대한 통찰과 이에 대한 긴급한 발언의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에셀은 일찍이 드골 장군이 주도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여 사형선고까지 받은 적이 있는 투사 출신의 활동가로서, 그는 93세의 고령임에도 자신이 체험했던 저항운동의 정신과 공화국의 민주전통에 대한 높은 자부심에 입각하여 사르코지 시대 프랑스의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훼손된 인권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2013년체제 만들기』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을 사르코지 시대의 프랑스에 비교하는 것조차 과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재앙’ 수준의 사태에 직면한 현실진단인 만큼『분노하라』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과 훨씬 더 치밀한 공력의 산물이다. 불과 2백 페이지 미만의 소책자이면서도 만만한 접근을 허용치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방금 ‘긴급한 발언의 필요’라는 말을 했지만, 그 점은『2013년체제 만들기』가 2009년 9월부터 2011년 12월까지의 기간 즉 이명박 정권의 퇴행적 본질이 본격화한 기간에 발표된 논설들의 모음이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집필의 기간이 짧고 현실진단의 직접성이 확연하다뿐이지, 거론되는 내용은 오랜 사색과 끊임없는 검증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기에 낱말 하나, 문장 한 줄마다 높은 밀도를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는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대충이나마 백낙청의 저작 전체를 돌아보는 일을 겸하게 된다.
먼저 한 가지 지적할 것은 1960년대 중반 문학평론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가 처음부터 강한 현실적 관심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 윤곽을 완성한 그의 민족문학론도 순수한 이론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엄혹한 현실에 맞서 한국문학의 정당한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 민족문학론이 1980년대의 좌절과 폭발을 겪으면서 분단현실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인 인식을 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발전이다. 내가 알기에「민족문학론과 분단문제」(1987년 10월 대구 지방사회연구회 심포지움 발제문)가 민족문학론으로부터 분단체제론으로의 이론적 분화를 보여주는 첫 번째 시도라면,「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창작과비평』1992년 겨울호)는 아마 그의 분단체제론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첫 성과일 것이다. 이후 20년 동안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그때그때의 상황변동에 적응하면서 당면한 현실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현실변화를 추동하는 개념으로서 오늘까지 진화를 거듭해왔는바, 그의 최신의 현실변화 담론인 ‘2013년체제’론도 그 연장선 위에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2013년체제 만들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분단체제론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우선 책에 나온 저자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 국민에게나 전쟁은 참혹하고 평화가 소중하지만, 분단체제에서는 평화의 의미가 남다른 바 있다. 양쪽의 기득권층이 상대방을 적대시하면서도 그 적대관계로 인한 긴장과 전쟁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반민주적 특권 유지의 명분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체제가 분단체제이다.(p. 19)
남과 북의 기득권세력이 한편에 있고 그 기득권세력이 유지하는 분단구조에서 손해를 보는 대다수 남쪽의 국민과 북쪽의 인민들이 다른 한편에 있는, 이런 이해관계의 상충이 더 기본적인 사회구조, 엄밀한 시스템은 아니더라도 체제 비슷한 것이 작동하고 있지 않느냐, 이게 분단체제론의 문제제기예요. 국가나 이념 위주가 아니라 민중 위주로 분단현실을 파악하자는 발상이지요.(p.140)
다른 말로 요약하자면 한반도의 남과 북은 각기 독립적 실체로서 단순히 분립되어 있거나 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상호관계 속에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낙청 문제제기의 핵심은 하루하루의 생업에 매달린 일반인뿐만 아니라 과학적 현실인식을 본업으로 하는 학자들조차 이 엄중한 사실을 잊기 일쑤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우리의 한반도 현실에서는 모든 사회현상이 분단과의 연관을 피할 수 없으며, 어떤 긍정적 개혁도 분단에서 오는 근본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예컨대 그는 ‘87년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분단체제론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자유화 및 ‘자주’와 ‘통일’에의 요구라는 세 영역에서 모두 뜻깊은 성취를 이룩했지만, 그것들이 “어디까지나 한반도 남녘에 국한된 성취”였기에 “1953년 휴전 이후 굳어진 분단체제를 흔들기는 했을지언정 ‘53년체제’의 틀을 바꾸지는 못했다.”(p.52) 그랬기 때문에 1987년 이후 20여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민주주의는 지지부진의 양상을 보이고 경제적 자유화 과정은 점차 신자유주의적 퇴행현상을 낳게 되었으며, 결국 일시적이나마 이명박 정권 같은 터무니없는 세력의 등장과 그들에 의한 가당찮은 역주행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따라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일은 백낙청의 사유에서 근본핵심이 된다. 그리고 그런 확고한 입장에서 그는 지난날의 통일운동 과정을 점검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펼친 ‘햇볕정책’과 6·15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즉, 그는 1972년의 7·4공동성명을 효시로 하는 민·관의 단속적인 통일노력과 통일정책이 6·15공동선언에 이르러 일정한 완성을 달성했다고 보고 컴퓨터용어를 빌어 이를 ‘포용정책 1.0’버전의 출시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이 1.0버전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고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햇볕정책이 더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초기의 압도적인 국민지지가 상당부분 유실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적대정책이 채택되고 클린턴 시절의 한미공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시민참여의 꾸준한 확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장기적 ‘분단체제극복’ 과정이라는 인식이 애초부터 미약했으며, 이 과정의 핵심이자 6·15공동선언의 가장 빛나는 성취에 해당하는 남북연합에 관해서 집권기간 내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중략) 앞 절에서 언급한 포용정책 1.0의 문제점들 다수가 남북연합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충실했는지 의문이다.(p.114)
따라서 분단체제를 제대로 극복하는 사업이 다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동안 정지 상태에 빠졌던 김대중·노무현시대의 포용정책이 재가동되더라도 그것이 과거로의 단순한 복귀일 수 없고, 말하자면 ‘2.0버전’이라 불릴 만큼 획기적으로 쇄신된 내용이어야”(p.97) 하는 것이다. 바로「‘포용정책 2.0’을 향하여」가 백낙청의 그런 쇄신된 구상을 담은 논문인데, 이 글은 여러 선각자들에 의해 이어져온 다양한 통일논의를 한걸음 진전시켰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통일논의를 한반도 전역에 걸친 변혁운동의 요구와 불가분하게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우리의 역사적 시야를 전 방위적으로 넓히고 있다.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시민평화포럼 주최 대회 기조발표문, 2011.3.10)를 시발로 한 일련의 논문들은 그러한 확장의 최신의 결과물이다. 당연히 그것은 ‘포용정책 2.0’의 구상을 전적으로 수용하되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2012년 선거 국면을 현명하게 돌파하기 위한 긴박한 실천론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세계질서의 전환에 따른 -동아시아 지역연대론 같은- 일종의 문명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논의에 포함된 주장과 전망들은 하나같이 막중한 문제의식과 결부되어 있고 때로는 우리의 통념적 사고를 발본적으로 뒤엎는 것이어서 섣부른 요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진다는 취지에서 ‘2013년체제론’의 내용이라 할 만한 구절들을 발췌해보겠다. 기회가 닿으면 더 넓은 지면에서 이 구절들에 함축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좀더 솔직한 토론을 해보고 싶은 의욕을 느낀다.
① ‘2013년체제’는 87년체제와도 또 다른 차원의 성취가 될 수 있다. 곧, 1953년 정전체제 성립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공유하는 시대구분을 이룩할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p.18)
② 이때 유념할 점은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점진적·단계적 통일과정의 진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너무 급속하고 전면적인 통일을 추구해도 평화에 위협이 되지만, 통일을 제쳐두고 평화만을 이야기한다고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20)
③ 시민참여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중략) 일차적으로는 남북연합 건설작업에 역행하는 정권을 견제하는 일이며, 나아가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수용하는 국정운영체제로 하루속히 전환하는 일인 것이다.(p.119)
④ 2013년체제의 주요 과제는 87년체제와 더불어 그 본질적 제약으로 작용한 53년체제를 타파하는 일입니다.(중략)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더불어, 통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별개 국가로 분립한 상태도 아닌 ‘남북연합’이라는 분단현실의 공동관리장치, 그러면서도 한반도의 맥락에서는 ‘1단계 통일’로 간주할 수 있는 단계를 성취해야 합니다.(p.52)
⑤ ‘민주·평화·복지사회’가 약칭으로 채택되든 않든 2013년체제의 내용이 그 세 가지 의제로 국한될 수는 없다. 물질적 불평등의 폐기와 생태친화적 사회로의 전환, 성차별 극복 같은 세계체제 공통의 장기적 과제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된 중·단기적 정책기획이 포함되어야 한다.(p.83)
⑥ 2013년체제는 바로 이러한 집결(연합정치를 통한 민주진보세력의 집결 =인용자)이 달성되어 분단체제 특유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를 뜻한다.(p.90)
⑦ 2013년체제의 형성은 그러한 역할(동아시아연대 형성과정에서의 한국정부의 능동적 역할=인용자)-및 민간 차원에서도 획기적인 교류 증대-을 당연히 수반할 것이며, 한반도의 국가모델을 전환하는 작업 또한 그러한 지역연대 형성의 맥락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p.26)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 <이달의 책>. 201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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