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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건국절의 항공모함, ‘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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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07 14:09 조회23,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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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첫 항공모함이 오는 10월 1일 건국기념일에 진수될 예정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나포되느니 차라리 수장을 택했던 러시아 군함 ‘바랴그’ 호의 이름을 따 1988년 소련에서 착수된 이 배는, 이듬해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 등 악재 속에 방치되다 우크라이나에 팔렸다. 중국이 구(舊) 바랴그 호에 관심을 보인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1992년 해상 전문가단을 파견하여 타당성 조사를 벌였고 1994년 구매를 결정했지만,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우려한 미국과 일본의 간섭으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1998년 홍콩의 여행회사 청랏(Chong Lot)을 거쳐 결국은 중국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애초에 청랏은 마카오에 해상 카지노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구매했지만, 이 회사가 중국 해군과 긴밀히 연관된 다른 두 홍콩 회사의 자회사라는 점 등을 볼 때 그 의도는 처음부터 명백한 것이었다.


역사의 구구한 사연과 곡절을 지닌 구 바랴그 호는 2007년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그 성능과 사양을 고려할 때 실전 투입 가능성을 논하기는 시기상조라지만, 이미 군사적으로 세계 초강국의 지위에 올라선 중국에 항공모함까지 갖춰진 바에 주변국은 물론 전세계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할 터다.


이처럼 세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구 바랴그 호는 정작 중국 내에서는 명칭을 둘러싸고 논쟁이 뜨겁다. 현재 유력한 정식 명칭은 ‘스랑’이다. 스랑(施琅, 1621∼1696)은 청나라 강희제 때 수군제독으로 대만 정벌에 탁월한 공을 세운 장수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생소한 것은 우리가 중국 역사에 무지한 탓만은 아닌 듯하다. 중국에서도 좀처럼 조명받지 못하던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이후에 와서였다. 특히 2000년 대만 대선에서 ‘독립파’ 민진당이 승리하자 대륙은 그 대항이데올로기로서 ‘통일중국’을 선전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런 붐 속에서 스랑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이다. 2001년 CCTV가 제작하여 황금시간대에 방영한 사극 <강희제국>과 2003년 푸젠영화사가 만들어 역시 CCTV 황금시간대를 장악한 <스랑대장군>은 명청교체기라는 민감한 역사에 대한 과감한 재해석을 통해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한 ‘민족영웅’ 스랑을 대대적으로 부각했다.


그러나 ‘민족영웅 스랑’은 대만은 물론 대륙에서도 적잖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 스랑은 이민족(淸)의 중원침략에 최후까지 맞섰던 한족(漢族) 기개의 상징 정청궁(鄭成功)과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이다. 원래 스랑 집안은 정청궁의 부친 정즈룽(鄭芝龍)의 수하에 있었다. 그의 당숙 스푸(施福)는 정즈룽이 정치적 기반을 닦는 데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청궁과는 맞지 않았던 듯하다. 결국, 정청궁에 의해 일가를 몰살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청으로 망명한(1646) 스랑은 훗날 강희제의 대만 정벌군의 선봉장이 되어 정씨 일가를 섬멸한다(1681).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청 조정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대만 수복에 회의적이었다 한다. 스랑에게 맡겨진 임무도 남해에서 빈번히 도발을 일으키는 명(明) 잔당의 소탕이었지 대만 자체의 점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랑은 조정의 이 같은 중론에 반대하여 대만 수복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그것이 채택되어 대만은 1895년 일본에 할양되기 전까지 청나라 영지로 복속되었던 것이다.


종족주의(즉, 한족중심주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중국 역사서사에서, 아무리 ‘대만독립’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한들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정청궁을 폄하할 순 없었다. 마찬가지로, 비록 대만을 정벌하여 통일중국의 기초를 세웠지만 스랑은 오랫동안 ‘배신자’의 낙인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후반 스랑에 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스랑은 정청궁의 배신자가 아닌 계승자”라거나 “정청궁의 대만 수복과 스랑의 대만 수복은 모두 중화민족의 대의를 담고 있다”는 기괴한 해석들이 등장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명청교체를 종족갈등으로 보지 않고 승자에게 정통성을 이양하면서 자연스레 ‘한간(漢奸, 매국노)’ 관념이 약화된 최근의 역사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처럼 승자의 합법성을 강변하는 역서서술이라면, 청군과 결탁하여 베이징을 함락한 우싼꾸이(吳三桂)도 영웅이며, 더 나아가 만약 2차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면 당시 일본의 괴뢰 노릇을 했던 왕징웨이(汪精衛)도 영웅이 되는 것이냐는 비아냥마저 나오는 상황이다(胡文輝., 「古典今情中的施琅」).


스랑의 역사적 평가는 한족 종족주의와 중국 국가주의의 간의 묘한 균열지점에 놓여있다. 안팎으로 소란한 변경문제와 양안문제를 해결하는 데 편협한 종족주의의 극복은 분명 중국이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속에 실재했던 굴곡을 말끔히 밀어버리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현실정치의 정당성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동원되는 한, 과거의 은원은 언제고 현실로 되돌아올 것이다. 바야흐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하강이 가시화되는 지금, 새로운 강국 중국에 항공모함이 갖춰지는 것은 사실 정해진 수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우려해야 할 것은 중국의 강해지는 군사력보다는, 그 내면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의 조야함, 그리고 그것이 주변에 미칠지 모를 거대한 화력이 아니겠는가.


백지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서남통신. 201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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