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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아시아의 고아 : 중국 ‘바링허우’가 보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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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2-30 11:17 조회21,6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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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애사(哀事)가 있던 지난 주, 나는 마침 중국 남단의 섬 샤먼(厦門)에 있었다. 중국현대문학 관련한 어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중국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물어왔다. 김정일의 죽음에 한국사회의 반응은 어떠냐, 한국은 북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 등등. 이야기는 자연스레 남북통일 쪽으로 흘렀고 그 중 누군가는 아주 솔직하게,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그럴 것이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동아시아에서 현재의 균형상태가 깨지는 것을 대체로 원치 않는다.

 

이제 한반도의 통일 여부는 더 이상 남북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문제로서 주변 국가들의 힘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강자인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현재 중국은 북한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우방이며, 또 북한에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중국 사람들에게 북한은 어떤 곳일까. 그들은 북한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북한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마음은 무엇일까. 최근 매서운 필력으로 중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젊은 문화인사 한한(韓寒, 1982~)의 북한에 대한 발언은 우리로서도 곱씹을 만한 점이 많다. 1999년 장편소설 『삼중문(三重門)』으로 일약 스타작가 덤에 오른 한한은 궈징밍(郭敬明, 1983~)과 함께 2000년대 ‘바링허우(80後)’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이후 상업문화 영역에서 성공 가도를 달린 궈징밍과 달리 한한은 중국 사회에 대한 뼈있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논객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비록 당국의 금지조치로 정간당했지만, 2010년 그가 창간한 잡지 『독창단(獨唱團)』 1호가 초판 30만 부를 찍은 사실은 그의 영향력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한한의 블로그에 <아시아의 고아>라는 글이 있다. 원래 ‘아시아의 고아’는 1940년대 대만에서 나온 소설의 제목이다. 일본과 중국대륙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는 대만인의 슬픈 운명을 그린 우줘류(吳濁流)의 소설은 1983년 대만의 민중가수 뤄따여우(羅大佑)에 의해 동명의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아시아의 고아가 바람 속에 울고 있네. 누런 얼굴에 말라붙은 붉은 흙, 검은 눈망울에 비친 흰색 공포, 서풍은 동방에서 슬픈 노래 부르네”로 시작하는 노랫말에서 한한이 떠올린 것은 대만이 아닌 북한이었다. 북한에 비한다면 지금의 대만은 기껏해야 국제사회에서 곤경에 처한 ‘문제아’, 아니 차라리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에 가깝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북한이 중국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병하여 북한을 도왔던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양국 우호의 오랜 상징으로 기억되어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 전세계적 반중시위로 얼룩졌던 성화봉송식도 유독 북한에서만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를 두고 많은 중국 네티즌들이, 역시 ‘항미원조’ 하길 잘했다, 환난지교야말로 진정한 우애다, 다시 북한에 전쟁이 나면 꼭 도와야한다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런 것이 과연 진정한 우애일까. 한한의 냉소는 가차없다. 이야말로 조공시대의 꿈에 젖은 중화민족주의의 발로이며 자기에 대한 작은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한 애국심의 반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위선적 심리를 그는 이렇게 질타한다, “나라 안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세계는 북한처럼 되길 바라지 말라”고.

 

몇편 안 되지만 한한의 북한 관련 글엔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균형 감각이 엿보인다. 북한을 형제라 부추기는 언설 안에 잠재된 멸시와 자기과시의 심리를, 그는 여지없이 꿰뚫는다. 그는 북한을 통해 중국을 본다. 낙후한 독재국가를 동정하기 앞서 권력의 보편적 본질을 통찰한다. ‘조선인민민주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부터 ‘민주’의 실종을 통렬히 꼬집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어딘가 착잡하다. 그것은 그가 북한을 순연한 타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늘 오십보백보의 심정으로 북조선이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더는 아시아의 고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설사 중국처럼 적당히 한발만 걸친 채 싫은 내색 좋은 내색 하지 않고 우물쭈물 딴소리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더는 지도자의 초상화를 어루만지면서 울먹이며 춤추지 않으니 ...... 몇십년 전 우리는 어떤 계급이 권력을 가져야하는지에 골몰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계급이 권력을 쥐느냐가 아니다. 누구든 권력을 장악하면 새로운 계급이 되니까...... 권력을 장악하는 법보다 권력을 제한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인물이다.” (韓寒, <亞細亞的孤兒>, 2010.6.24.)

 

나는 “오십보백보의 심정”이라는 그의 말에서 ‘형제애’보다 더한 진정성을 느낀다. 분명 그는 북한의 독재정치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통과한 비판이다. 냉정한 시선으로 그는, ‘형제애’를 말하는 중국인의 심리에 잠복한 우월감, 세계화의 궤도에 먼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자부심의 정당성을 되묻는다. 적 아니면 아, 흑 아니면 백의 논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국내외 북한언설의 현실을 생각할 때, 중국 청년의 이런 원숙한 사색은 비단 중국인에게만 경청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백지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서남통신. 201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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