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성공신화의 포로, 서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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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4-13 08:31 조회34,8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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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간 대학 개혁과 동의어처럼 여겨졌던 서남표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총장의 처지가 말씀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로 징벌적 차등 등록금제와 전면 영어강의 등 그의 핵심 정책은 전면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학내외에서 그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치고, 한때 그의 말을 한국 교육을 위한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일부 언론이나 교육계 인사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한 카이스트 교수는 서 총장의 비극을 그의 성공신화에서 찾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학과장으로 10년간 있으면서 교수의 40%를 바꾸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성공시켜 각광을 받았던 서 총장이 그 성공 경험에 붙잡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런 상황을 맞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무엇인가를 이뤄낸 사람이나, 온갖 고난을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 경험이 부메랑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넘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무능한 자로 치부해버리기 쉬운 탓입니다. 지난 5년간 카이스트에서 서 총장이 해온 일을 복기해보면 그 교수의 분석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서 총장은 징벌적 차등 등록금제와 전면 영어강의, 교수 테뉴어 제도 등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정책을 도입하면서 제대로 된 여론수렴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가 시행된 뒤 학생들이 공청회를 열고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학생들에게 돌아온 답은 ‘피리어드’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미 정한 것은 더이상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 이룬 그의 성공 경험이 아무리 귀중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토양이 다른 카이스트에 이식하려면 현장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소통이 아닌 일방통행이었습니다.
그는 일방통행식 정책집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학과장 중심제를 도입했습니다. 개별 학과에 힘을 실어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학과장에게 전권을 준다며 인사위 등 기존의 심의기구를 자문기구로 격하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부 단위의 목소리가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소통 불능의 구조가 고착됐다는 게 카이스트 교수들의 지적입니다.
소통을 기피하는 일방통행식 사고는 소수의견이나 소수자에 대한 무시로 나타났습니다. 2007년 서울대 강연에서 “50% 이상이 찬성하면 반대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게 단적인 예입니다. 전면 영어강의에 학생들의 50% 이상이 찬성한다면 나머지 학생들은 처지가 어떻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업을 따라갈 수 없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 방안도 마련하지 않은 채 징벌적 차등 등록금으로 위협하며 밀어붙였으니, 전문계 출신의 로봇 영재 같은 학생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서 총장이 이 무한경쟁의 문제점을 몰랐을까요? 그의 서울대 강연과 문답을 묶어 낸 <한국 대학의 개혁을 말한다>를 보면 그가 “우리 학생들 압박이 많습니다. 학점을 B 이하로 받으면 수업료를 내야 하니 부담이 크죠. 부모님한테 전혀 그런 소리 안 하다가 돈 달라고 해야 하니까 그게 커다란 압박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년 보장이 안 된 우리 교수들 압박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게 자살입니다”라고 말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자신의 정책이 학생이나 교수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음을 알면서도 밀어붙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받을 압박을 완화해줄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마련해준 것도 아닙니다. 그의 경쟁지상주의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섬뜩하지 않습니까?
더이상 이런 사람에게 한국 공학교육의 요람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서 총장으로서도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카이스트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입니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1.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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