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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숙] 작은 돈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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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22 08:40 조회22,0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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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금속을 수집해 되파는 재활용업체 사장 이윤정(가명)씨.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도박과 폭력을 일삼는 남편, 게다가 여덟 식구 생계를 떠맡아 노점에서 옷도 팔고 비디오가게와 호프집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남편이 또 행패를 부리던 날, 그는 어린 딸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가진 건 낡은 승합차 한 대, 현금 2만원과 빚이 전부. 쉼터를 거쳐 월세방을 얻은 그는 재활용회사에 들어가 억척으로 일을 배웠다. 업무회의 내용은 녹음해 퇴근 후 복습해 익혔고, 휴일이면 지게차 운전 연습을 했다.
 

창업하고 싶었지만 은행대출이 불가능한 그에게 아름다운재단은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었다. 한부모가 된 그는 그렇게 ‘희망가게’ 주인이 되었다. 회사 다니며 몸 사리지 않고 배운 일솜씨와 열정이 보태져 사업은 일찌감치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대출금과 연 2% 이자를 창업 3년 만에 모두 갚은 그는 “어려울 때 돈만 빌려 쓴 게 아니라 희망까지 빌렸으니 이자도 참 싼 이자다”라고 말한다.

‘가난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빈곤의 여성화’ 중심에 여성 가장이 있다는 건 오랜 상식이다. 한부모 가구 중 80%가 여성 한부모. 이들 가정의 아동빈곤율은 평균의 3배, 소득은 남성 가구주의 절반이다. 경제적 고통, 끈질긴 편견과 낙인은 맨발로 얼음 위를 걷는 삶이다.

 

‘희망가게 프로젝트’는 8년 전 한 기업가의 유산 기부로 시작되었다. 돈보다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더 큰 힘이 되었다는 그녀들. 가게에 담은 그녀들의 꿈이 부서지지 않도록 경영 컨설팅, 교육과 정서 돌봄 프로그램도 당연히 함께 가며, 상환금은 또다른 여성 가장의 창업 대금으로 선순환된다. 이달 말 100호 가게가 문을 연다. 희망가게는 참 느리다.

 

방글라데시에서 무함마드 유누스 총재가 시작한 ‘그라민 은행’이 성공하면서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 브랜드가 되었다. 대출자 중 여성이 95%. 유엔은 2005년을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로 정했고, 유누스 총재는 2006년 노벨평화상과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그라민 은행을 본떠 여러 나라에 속속 이 사업이 등장했고, 대출자금 규모가 커져 거대기업화된 곳도 있다. 인도에서는 최근 몇년간 시장이 10배나 불어났다. 그러나 얼마 전 유누스 총재가 분분한 이유로 사퇴하면서 이 사업은 도마에 올랐다. 터무니없이 높은 금리와 상환 독촉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고리대금업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높다.

 

장하준 교수 말대로 위대한 ‘희망’이 위대한 ‘환상’이 된 것일까. 소액대출이 빈곤의 뿌리를 뽑는 최고 해법은 아니다. 문제는 사업 자체가 아니라 제도금융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눈과 운영방식이다. 사업이 거대화·제도화되면서 사람보다 시스템이 더 앞서는 것, 대출 금액과 대출자 수로 성공을 따지고, 돈 회수에 무리수를 두는 데 있다. 마이크로크레디트,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작은 돈’이다. 스스로 서려는 그들의 작은 의지를 잊지 않을 때, 너무 크거나 너무 빠르지 않게, 관보다는 공동체와 상호연대의 가치를 지닌 민간이 주도할 때 작은 돈은 생명이 된다.

 

세계 최초의 비영리 벤처캐피털 ‘어큐먼 펀드’의 설립자이자 <블루 스웨터>의 저자 재클린 노보그라츠는 말한다. “우리는 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거듭 배웠다. 더욱 강화시켜야 할 것은 깊이 공감하는 능력이다.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성공의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머리보다 먼저 가슴으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정숙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한겨레. 201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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