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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그의 소설은 한국 사회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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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07 14:12 조회23,7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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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는 것이 제대로 된 독해 방식일까? 모르긴 해도 이 문제를 놓고 수많은 논쟁이 있었을 터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시선의 일치 또는 불일치, 작가와 평론가 사이의 가치의 합의 또는 불화, 평론가와 독자 사이에도 견해의 수렴 또는 분열이 있을 게 분명하다. 이런 삼각 구도 외에도 출판 마케팅계의 큰 손들이 구름처럼 존재하고 있는가 하면, 꼭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시대적 트렌드라는 요상한 '지니'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방식을 요리하고 재단하고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학 독해 방식을 놓고 이렇게 복잡한 고려 사항이 있기도 하지만 의외로 단순한 원칙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도 한다. 그것은 일단 세상 속에 던져진 모든 창작품은 모든 이의 소유라고 하는 해방의 원칙이다.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든 독자의 자유라는 말이다. 일견 난폭해 보이기도 하고 일견 무식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기본적 차원에서 옳은 지적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 눈이 판단하기 나름"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와 같은 사회과학도가 문학 작품을 공부와 관련해서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읽어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무방한 정도가 아니라 때에 따라선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와 공부 경험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도대체 어떤 문학 작품이 사회학자에게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과 공부 경험을 동시에 줄 수 있을까? 성석제의 <아름다운 날들>(강 펴냄)을 하나의 사례로 삼아 이야기해 보자.


이 작품은 성석제가 1998년에 낸 소설 <궁전의 새>를 새롭게 고치고 확장시켜 2004년에 다시 펴낸 장편 소설이다. 개정판을 낸다는 것은 저자가 그 책에 대단한 애착이 있다는 말이다. 웬만한 개작은 신작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성석제가 이 작품에 얼마만한 개인적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날들>을 읽는 정통적인 독해 방식은 한편의 성장 소설로서 읽는 것이라 생각된다. 책 뒷 표지의 설명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가 빚어낸 성장 소설의 백미"라고.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살바토레 디 비타가 어린 시절의 시실리를 추억하듯, 장년이 된 소설가가 어린 시절의 고향을 <아름다운 날들>을 통해 회상하는 내용으로 읽으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아름다운 날들>은 문학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것만 해도 작가로서 행복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느 산골마을에 장원두라는 착한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로 시작되어 원두가 자기 집안과 마을에서 만나는 여러 인간 유형들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린다. 그 여정을 통해 독자들은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흘러내리는 희한한 상태 즉 '웃물'의 경지를 체험한다.


성장 소설로서 <아름다운 날들>은 작가의 의도에 동의하고 작가를 신뢰하면서 작가가 인도해 주는 '석제 랜드'의 영토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독자에게 깊은 인상과 잔영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에 앨리스가 산다면 석제 랜드엔 원두가 산다. 이 사실만 받아들이면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날들>을 사회과학도가 공부의 대상으로 읽을 수도 있을까? 나는 그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 마디 미리 해둘 말이 있다. 성석제가 <아름다운 날들>을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필한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사회과학도가 이 작품을 통해 사회를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거나, 아니면 작가의 고도로 계산된 결과-울리고 웃기기만 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강렬한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작심한-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 소설은 우리가 지나 온 한 시대를 인상 깊게 들려주는 풍부한 증언록이자 기록으로 읽을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형식을 빈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석제가 유년을 보낸 1960년대와 1970년대 전반, 나를 포함해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한 모든 이들이 겪었던 한 시대의 세밀한 기억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보물 창고 같은 작품이다.


이런 식으로 한 시대의 소소한 일상들을 훌륭하게 복원해낸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석제표 보물 창고가 여타의 시대극과 다른 점은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류학적 관찰력을 바탕에 확실히 깔고 있으면서도 총연출 자체는 어디까지나 직업 작가의 문학적 서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성석제의 작품을 사회사 연구의 보물 창고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을 간혹 사회적으로 독해하지 못하게 가로막곤 하는 요인이다. 따라서 그를 흔히 묘사하는 '이야기꾼'이라는 라벨은 오해하기 딱 좋은 표현이다. 그것을 그저 구수한 입담의 '전설 따라 삼천리식' 브랜드 정도로 이해한다면 작가의 사회·인류학적 깊이의 10분의 1도 포착하지 못한 셈이다.


과문해서인지 나는 이 점을 제대로 짚은 평론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성석제 자신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전설 따라 삼천리면 어떻고 삼천리 자전거면 또 어떻습니까?"라고 다소 생뚱맞게(성석제 식으로) 반문할지도 모른다. 타고 난 프로이니 그런 반응이 사실 놀랍진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날들>이 자리 잡고 있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한국 농촌의 현실은 온 나라의 본격적인 산업화 그리고 이농과 도시화가 진행되던 문턱에 놓여 있었다. 한편에서는 '읍민가창경연대회'와 같은 행사를 통해 사회적 자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나던 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혼식분식 장려 운동과 같은 사회의 집단 규율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기치 아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대체되고 있던 바로 그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미국공법 480호(정식 명칭은 미국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에 의한 국제 원조가 실시되고 있었다. 당시 구호 물자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원해 주는 모든 '물자'를 뜻했다. 버터 깡통, 깡통 초콜릿, 분유 깡통, 깡통 사탕, 헌 오버코트, 헌 장난감, 헌 구두, 헌 책 등등 "구호 물자와 전혀 관계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또 정부의 영농 정책으로 해를 넘길수록 형편이 어려워지는 농민들의 서글픈 신세, 쇠망해가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이 때로 신랄하게 때로 비극적으로 그러나 결코 비장하지 않게 페이지를 메우고 있다. 이런 대목에 이를 때마다 독자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웃물'을 흘려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역시 성석제표 답다.


그 뿐인가. <아름다운 날들>의 시대는 공교육의 국가주의적 훈육화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예컨대 소설 2부의 "도시락"이라는 꼭지에서는 당시 시골 사람들이 의무 교육을 이해하던 방식, 혼식 장려 운동의 어설프면서도 강압적이던 실상, 권위주의적이고 자의적인 교사의 폭력적 교육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페이소스 가득한 연민의 눈길로 그려지고 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시골구석에까지 들어와 성당을 세우고 영혼 구제와 원조 물자 배급을 담당하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우화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졌는지 놀라울 정도다. <아름다운 날들>에 묘사된 당시 농촌 현실이 얼마나 정확한 사회사적 자료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가를 뒤졌다. 작가의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에 진출한 서양 선교사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한국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2009년 펴낸 <분도통사>를 보면, 함경도 덕원에 있던 수도회가 한국전쟁 후 남한의 왜관으로 내려 오고 나서 1957년 7월에 독일 출신의 엘리지오 콜러 신부가 상주 본당에 부임해 왔다고 나온다. 그 후 서문동과 남성동에 각각 성당이 생기고 엘마로 랑 신부, 토마스 팀프테 신부 등이 1960년대 상주 지역에서 사목을 했다고 한다. 성석제가 말한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랗고 검정 긴치마 같은 옷을 입은 신부라 하면 필경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아름다운 날들>은 픽션의 방식으로 논픽션의 사료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사회사적으로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처럼 얼핏 아이들의 장난 이야기처럼 들리는 성장 소설로부터 한 시대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에 접할 수 있다는 건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행운이자 축복이다. 몇 년 전부터 세계 사회과학계에 등장한 흥미로운 시도가 있다. 이른바 '국제 발전론 연구로서의 소설 읽기'라는 움직임이다.


아룬다티 로이나 나지브 마흐푸조와 같은 개발도상국 작가의 작품을 문학으로서만 아니라 사회과학 연구용 자료로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학문 운동이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아름다운 날들>과 같은 문학 작품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사회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왜 서두에서 이 작품이 사회과학도에게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과 공부 경험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그런 면에서 한국의 개발 독재형 발전 모델을 연구함에 있어 일종의 원사료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다.


이처럼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아름다운 날들>은 한국의 독특한 정치·경제·사회적 경험을 국제적인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요즘 한국 문학의 외국 번역·소개에 관한 논의와 시도들이 많지만 나는 그런 작업이 이러한 작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하면서도 환상적인 시대상이 민속지적 리얼리즘 속에 녹아 있고, 폭포수처럼 풍성한 언어의 융단 폭격이 사회·인류학적 관찰에 원기를 불어넣고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날들>을 국제적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뭐랄까, 이디시 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 1978년 노벨 문학상을 탔던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루블린의 마법사(The Magician of Lubin)>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그 책 이상으로 매력적인 데다 그보다 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가 은근히 우리 심장에 박동을 더해 준다.


이 가을에 어디 좋은 소설 한 권 없나 하고 찾는 분들에게 <아름다운 날들>부터 시작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사회학자가 추천한 문학 작품이 어떨지 확인할 겸해서.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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